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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고다르와 원죄 없는 영화, <열정> 속 회화의 문제
이나라 2024-11-20

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열정>

장뤼크 고다르의 <열정>(1982)은 첫눈에 영화와 회화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렘브란트의 <야경>과 같은 유명 회화를 <열정>이라는 제목을 단 영화로 재구성하느라 분주한 영화인지 텔레비전인지 알 수 없는 어느 대규모 제작 현장이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조명기기가 현장을 비추고 있고 감독, 프로듀서, 장치, 운영진이 내는 소리와 움직임으로 사방이 들썩이는 가운데 17세기 바로크회화의 구성을 재구성하는 배우들은 정지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다. 고다르의 영화 <경멸> <주말> 등을 촬영했던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의 카메라는 <야경>의 세부와 인물에 차례로 포커스를 맞춘다. <야경>과 함께 보이스오버 목소리가 영화 제작진에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제작진은 “여기에는 이야기가 없다. 이것은 구성이다”. “이 (영화적 재구성) 장면은 사실 밤의 순찰이 아니라 낮의 순찰에 가깝다” 같은 답을 내놓는다. 영화 속 스크립터는 “외부 현실과 분리된 채 그럴듯함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계산”, 곧 영화적 장치가 만들어낸 “진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닌 장면”이라고 답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그럴듯함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계산”은 애초부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계산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폴란드 출신의 감독 제르지는 적절한 영화의 빛을 찾는 것에 실패할 뿐 아니라 영화 제작자의 압력에 시달린 채 혼란을 겪는다. 결국 영화제작은 좌초되고 영화 제작자는 할리우드로 떠난다. 그렇다면 고다르의 <열정>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렘브란트, 고야, 들라크루아, 엘 그레코 등의 회화적 세계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실패하는 기술 재생산 시대의 기계적 매체를 다루는 이야기일까?

하지만 우리는 고다르가 영화산업을 비판하기 위해 “아우라의 예술”을 동원하는 순진한 예술 애호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열정>의 시나리오는 고다르가 처음부터 고전 회화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열정: 세계와 세계의 은유>라는 제목을 가진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고전 회화는 영화와 함께 세계를 은유하는 매체로 영화에서 다루어진다. 특히 영화 속 활인화 인용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엘 그레코의 <원죄 없는 마리아>는 가장 적극적으로 영화적 서사와 의미의 생산에 기여한다. “원죄 없는 마리아”란 가톨릭 교회에서 수세기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주제다. 처녀로 신이자 인간인 예수를 잉태한 성모 역시 인간과 달리 원죄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주장, 곧 인간의 육체적 관계 없이 태어났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고다르는 극 중 영화감독 제르지와 마을 노동자 이자벨의 최초의 내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면에 죄 없이 태어난 성모를 주제로 삼는 그림을 교차편집한다. 제르지와 이자벨의 대화와 엘 그레코 회화 사이의 교차편집을 세밀하게 언급하기에 앞서 영화에 앞서 등장했던 회화적 재구성과 영화 디제시스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 사례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해보자.

들라크루아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재구성 장면을 보자.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된 <야경> 촬영과 달리 십자군전쟁의 혼란과 참상을 담고 있는 이 그림의 활인화 촬영장은 카오스 상태다. 재구성에 동원된 말이 촬영장을 누비는가 하면 엑스트라 배우도 영화 제작진과 실랑이를 벌인다. 촬영장 밖에서는 호텔 주인 부부 사이의 실랑이, 파업 주동자 이자벨과 이자벨을 내쫓기 위해 온 경찰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촬영장에서 천사로 분장한 한 배우는 들라크루아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에서 재현된 천사의 몸짓으로 감독에게 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달려든다. 한편으로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영화 촬영 현장, 마을 사람들 사이의 소요와 혼란, 곧 세속 세계의 혼란을 ‘이미’ 형상화한 그림이라 가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 세계와 그림 속 세계의 분리 불가능성을 가정할 수도 있다. 회화 또는 영화가 제작과 노동의 문제인 동시에 사랑의 문제로서 세계를 은유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업을 시도하는 노동자 이자벨이 영화감독에게 관심을 호소할 때 이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것인가, 사랑을 호소하는 것인가? 이자벨은 “노동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노동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사랑과 노동은 같은 속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같은 몸짓”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노동을 요청한다. 영화 이전과 이후, 영화 촬영 현장과 바깥의 노동 없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영화의 역사는 자본에 배신당하는 동시에 노동을 배신하며 쓰였다. 이자벨의 말처럼 “영화는 공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사랑을 소재로 삼고, 사랑을 동력 삼아 만들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는 언제나 세계의 사랑을 착취한다.

사랑, 노동, 영화를 염두에 두고 다시 스페인 바로크회화의 전성기를 열었던 엘 그레코의 회화가 등장하는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제르지는 영화 연출을 포기하고 폴란드로 돌아가려고 한다. 호텔의 소란 속에서 가벼운 자상을 입고 이자벨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르지와 애정 관계를 맺고 있던 한나의 짧은 방문, 해고된 이자벨에게 돈을 지불하러 온 고용주의 짧은 방문, 야누스 데이 알레고리 시퀀스가 차례로 이어진 후 이자벨은 제르지에게 왜 자신이 영화 촬영장을 방문할 수 없었는지 묻는다. 이자벨은 그 때문에 자신은 (인간 예수가 아버지 예수에게 버림받은 듯이 느꼈던 것처럼) “버려진 것으로 느꼈다”고 말한다. 제르지는 이자벨에게 답하는 대신 “노동을 사랑하는지”, “사랑이 낱말에서 오는 것”인지 묻는다. 이자벨이 사랑은 낱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낱말을 향하는 것이라고 하자 (사랑을) 할 것을 제안하고 “처녀인지” 묻는다. 장면은 이제 회화적 주제와 세 가지 가닥으로 느슨하게 전개되던 영화 속 이야기를 ‘묶으면서’(영화학자 제임스 로이 맥빈) 엘 그레코의 <원죄 없는 마리아>로 이어진다. 수직으로 상승하며 엘 그레코의 그림을 조명하는 두개의 숏과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뒤로 할 것을 제안하는 제르지와 이자벨의 침실 장면을 보여주는 두개의 숏이 교차된다. 제르지는 창조주를 자처하며 창작의 노동을 포기하고, 조삼모사의 논리로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을 장담한다. 에이젠슈테인은 엘 그레코의 회화 속 공간 배치에서 회화적 몽타주의 탁월한 사례를 발견했었다. 톨레도(현실 공간)의 정경 위로 마리아와 천사의 환희를 그려넣었던 엘 그레코의 그림과 달리 제르지의 <원죄 없는 마리아> 활인화에서 현실 공간은 모두 사라진다. 고다르는 노동과 함께 사랑이, 사랑과 함께 영화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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