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6시면 눈이 떠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떠졌다기보단, 어색하게 잠이 들면 해가 기다려졌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는 그토록 밤이 싫었다. 일어난 후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산책이었다. 그리고 매번,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은 아빠였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매일 이른 아침, 우리는 걸었다. 아주 천천히.
2018년 여름, 모든 감각이 무뎠다. 유난히도 더운 해였지만, 춥다고도 덥다고도 느끼지 못한 채 나는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쓰러지기도, 넘어지기도 잘했다. 그러면서 많이 다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약을 발라주며, 혹은 기절한 나를 업어주면서 당신도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곤 했다. 늘 뛰어왔기 때문이다. “여보, 민하가 또 쓰러졌어. 정신을 못 차려”라고 엄마가 연락을 하면, 아빠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나에게 달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희미한 내 시야 속에서 그는 항상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내가 온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 아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단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빠, 내가 그렇게 계속 아팠을 때 무서웠어?” 나는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우리 딸 살려야지. 아플 수도 있는 거잖아.” 아빠는 대답했다. 잘 아물기 위해 아픈 것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거의 인터뷰 때마다 언급하는, 무너질 줄 아는 용기는 아빠한테서 배운 것이다. 딸바보였던 아빠는 우리 세 자매를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키우려고 노력하셨기에, 더욱더 엄격했다. 좋은 것을 보여주고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건,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의 힘으로 이것들을 얻어야 한다는 순리를 자득하길 바라서 하는 것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러기에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게으르지 말라고. 성적표는 중요하지 않아도 자신과의 약속은 꼭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래서 많은 경험들을 해야만 하고, 그중 무너질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겁내지 않는 것. 잘 아프고 잘 회복하는 것이 그래서 나에게는 자연스럽기도, 필수적이기도 했다.
아빠는 특히 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좋아한다. 아빠를 이따금씩 바라보면, 어쩌면 내가 가진 감수성은 아빠에게서 많이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느낀다. 어린 시절 공부밖에 몰랐던 아빠에게 유일한 숨구멍은 독서와 음악감상, 운동이었다고 한다. 특히 문학을 많이 접했던 그에게 ‘상상’은 무한한 장난감이었다. 음악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나 또한 워낙 여러 음악을 접하는 것을 사랑해서, 어릴 때부터 아빠와 음악 취향을 공유하는 걸 즐겨 했다. 좋아하는 것에 비해 자칭 음치인 아빠는, 그래서 내가 부르는 노래를 좋아한다. 지금도 음악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아빠를 향한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크다.
아빠의 상상력은 의사로 향하는 원동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상상하는 힘을 물려받은 나는 배우가 되었다. 나만의 우주를 만드는 것은 퍽 중요한 일이었다. 유치원생 때부터 특정 인물을 만들어서 낮이고 밤이고 그렇게 대화를 했다고 한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혼잣말을 많이 하곤 하는데, 이 모습을 본 아빠는 처음엔 내심 걱정하기도 했지만, 금세 허허 웃으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냐고 궁금해하셨다. 그런 아빠는 내 영역에서 트램펄린이 되어주었다. 콩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면 하늘 어디로든 날아오르게 해주는. 어떤 날개를 달든 믿어주고 같이 호기심을 갖고 날아주기도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래서 난 내 상상의 우주 안에서 탈주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모든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나서야, 나는 이제야 아빠가 나에게 그려준 동그라미가 큰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나’이기 때문에 줄 수 있던 사랑.
친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모습은 어린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조문객들을 정신없이 맞이하며 웃고 떠드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큰 이질감을 느낀 나는, 구석에서 책만 읽었다. 그리고 발인을 하던 날. 할머니와 진짜로 작별 인사를 하던 날,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여러분. 사랑한다고”라고 외치면서. 그제야 아빠의 모든 행동들이 납득이 됐다. 그리고 몇년 후, 아빠는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리 엄마 보고 싶다”라고 읇조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무서우리만큼 강해줘서 고맙다고.
아빠와 나의 소소한 행복은 문자로 저녁 메뉴를 정하는 일이다. 꽤나 진지하게 저녁 메뉴를 고민하곤 하는데, 대부분 나의 의견이 채택된다. 세 자녀 중 가장 무뚝뚝한 막내라서, 이렇게 주고받는 문자는 내가 표하는 가장 큰 애교다. 싱거운 포옹과 건조한 굿모닝/굿나잇 인사도. 그렇지만 꾸준하기에 어느샌가 약속이 되었다. 감수성 충만한 소년이기도, 열정이 넘치는 뜨거운 어른이기도 한 아빠. 우리 집에 놀러오는 길고양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던 건 왜일까. 이제는 내가 아빠의 손을 잡아줄 수 있기 때문일까. 무엇이 됐든 간에 이제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꼬옥 안아줄 것이다.
그리고 또 문자를 보낼 테지. 그래서 아빠, 오늘은 뭘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