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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이해와 단념 사이에서, <장손>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장손>은 가부장제의 끈질긴 유산이 남아 있는 대구 소재 일가족의 삶을 주인공인 ‘장손’ 성진(강승호)의 입장을 축으로 풀어낸다. 시대착오적 어감을 주는 제목을 굳이 고집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전근대적 가족 유산에 대해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 영화는 다소 묘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주인공 성진은 오랜만에 집을 찾아 모든 게 데면데면하면서도 자신을 살갑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환대에 따뜻한 정을 느끼는데, 완고한 할아버지와의 대면이 거북하고 무능한 아버지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꼴 보기 싫어하면서도 누이의 츤데레 성격에 맞장구를 치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오히려 편안함을 얻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의 입장과 통한다. 10여명의 캐릭터의 면면이 다들 개별성을 띠며 살아 있고, 잘 조율된 화면구성이 상당한 재능을 증거하는 이 영화가 문제적 지점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할머니의 죽음 뒤에 남은 것들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을 배경으로 제사를 치르기 위해 성진이 본가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손숙이 연기하는 할머니는 다른 식구들이 덥다고 아우성을 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다가 손자 성진이 오자 얼른 에어컨을 켜라고 성화다. 손숙의 존재감과 연기력 덕분에 이 할머니는 집안의 모든 여자들에게 야박하게 굴면서도 손자에게만 쩔쩔매는 구제 불능의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조력자이면서도 동시에 삭막한 가정에 유연하게 감정의 온기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라는 걸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할머니는 이 가정 내부에 바이러스로 잠복해 있는 구성원 각각의 트라우마를 억누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고 때로 그것들이 난폭하게 터져나올 때에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서둘러 제압한다. 젊었을 적 학생운동을 했다가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성진의 아버지 태근(오만석)은 두부 공장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실패자로서 술에 취하면 막무가내로 주사를 부리는데 폭력을 휘두르는 그를 성진과 어머니가 무력으로 제압해 마루에 내팽개쳐놓자 이불이라도 챙겨주라고 앙칼지게 지시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 가정의 실질적인 조정자가 누구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냉철한 이 할머니, 때에 따라서는 정신줄을 놓고 깜빡하는 남편/할아버지를 매섭게 몰아붙이는 이 가정의 숨은 지배자가 세상을 떠나자 성진의 가족에도 본격적으로 균열이 일어난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로 넘어가며 화면의 온도도 급격하게 차가워지고 가족구성원의 반목도 노골적으로 각을 세운다. 성진의 고모는 성진의 할머니에게 맡겨놓은 돈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웃들이 찾아와 할머니에게 맡겨둔 곗돈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이해관계를 둘러싼 가족 내부의 추한 이전투구가 슬며시 전면화되는 순간 남편의 병간호 수발을 들던 고모가 병원에 있는 사이 고모네 집이 누군가의 방화로 전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슬며시 미스터리/해결 플롯을 도입해놓고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영화는 자신의 방에 ‘국력배양’ , ‘통일성취’라는 한자어 표구를 걸고 사는 할아버지의 레드콤플렉스가 일가족이 몰살될 뻔한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매인 것이라는 뜻밖의 사정을 밝혀주고, 선산의 무덤이 비어 있는 사연의 내막을 추론하게 한다.

제사 준비로 떠들썩했던 영화 초반의 강제적인 활기는 이제 차갑게 식고 감독 오정민은 연민과 시정을 오락가락하면서 이 가정의 계승자이자 관찰자인 성진의 입장을 어떻게든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애쓴다. 그 이해의 통로를 제공하는 것은 여자들이다. 성진의 할머니는 물론이고 성진의 어머니, 고모는 이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직접적 피해 당사자로서 상호 이해와 적대감의 줄다리기에 지쳐 있다. 안민영이 연기하는 성진의 어머니 수희는 무능한 남편 곁에서 두부 공장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남편에게 이미 치인 상태인데 돈이 되지 않는 영화 일을 하는 아들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있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는 할머니가 처음에 자신을 차갑게 대해 서운했는데 알고 보니 시원치 않은 아들 때문에 고생할 며느리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랬었다는 사연을 성진에게 들려준다. 성진의 할머니처럼 성진의 어머니도 상호 존중과 배려 이전에 의무와 희생이 요구되는 이 부적절한 관계의 버팀목으로서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스스로 끌어안지 않은 관계를 강인하게 버티어나갈 것이다. 시어머니와의 애증 관계에 비해 훨씬 더 적대적인 성진의 어머니와 고모의 관계는 자손이 없고 남편이 병상에 있는 고모의 처지로 인한 이들의 비대칭적인 입장 때문에 더욱 심화되는데, 성진의 어머니는 성진의 고모가 불우한 처지를 핑계 삼아 집안 살림을 줄곧 축내왔다고 비난한다.

성진은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지만 실은 유일하게 그 모든 인물을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이해한다. 봉건적 마음의 갑옷을 입은 완고한 할아버지가 괄약근을 조절하지 못해 기저귀를 찬 채 툭하면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봐야 하는 처지라는 걸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선산에 가서야 실감한다. 근엄한 어르신이 어린아이처럼 배변을 못 가리는 상황을 손자에게 보여야 하는 치욕을 위무하듯이 그들이 성묘를 마치고 귀가하는 롱숏 화면에는 <봄날은 간다>의 서정적인 곡조가 깔린다. 남편 간병을 위해 병원에서 생활하는 고모를 위문하러 간 자리에서 성진은 ‘가끔 네가 내 자식이었으면 했다’는 고모의 고백을 듣고 평생 딸이자 아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면서 살았을 고모의 삶에 연민을 품는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고모는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당하면서 그들끼리 할퀴고 보듬으면서 살았다.

<장손>이 처한 곤경

제3세대인 성진은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게 고통과 짐을 안겨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남자들도 나름대로 감당하기 힘들어 버거워했던 그들 내부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성진의 애매한 입장을 통해 감독 오정민은 그 입장을 인간에 대한 연민과 궁극의 긍정으로 봐주길 바라는 결말을 취한다. 할아버지가 두부 공장에 들어가려다가 방향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긴 롱숏은 이 모호하고 관조적인 입장에 서정을 불어넣으려는 것 같다. 오정민의 신중한 연출 호흡은 클로즈업을 자제하고 풀숏 위주로 설계한 화면을 지향하며 가능한 한 가족구성원 전체를 다 포괄하는 앵글을 구사한다. 인간적으로는 연민이 가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선대들의 태도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들의 징글징글하고 억센 면면들이 남루함을 억지로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걸 이해하며 곳곳에서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가부장제의 축대를 어정쩡하게 지탱하는 주인공 성진의 모습은 이 영화가 처한 곤경을 드러낸다.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역지사지의 이해는 충분히 존중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과 주인공 성진에게 필요한 것은 ‘단념’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다는 감각, 그것이 이 가부장제의 희비극 스토리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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