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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어둠을 통해 삶을 말하기, <새벽의 모든>
조현나 2024-10-09

‘하지만 저녁 해가 지고 나면 반드시 아침 해가 뜬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소설 <새벽의 모든>에서 제목의 의미를 암시한 문장은 이 한줄 외엔 전무하다. 그렇기에 문장이 기술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비로소 주인공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두 사람이 겪은 고난을 밤의 시간에 대입해보게 된다. 영화에 묘사된 밤의 시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플라네타륨 시연 장면이다. 플라네타륨이 구현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참여자들에게 후지사와(가미시라이시 모네)는 회사 선배의 메모를 들려준다. “(…) 밤이 찾아와줘서 우리는 어둠 너머 무한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대로 쭉 밤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밤하늘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둠과 정적이 나를 이 세계와 연결하고 있다.”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 모두 원작 소설, 실존 인물의 자서전을 영상화했다. 하지만 원작에선 모티프를 가져온 정도일 뿐 영화에는 상당 부분이 각색돼 있다. 특히 영화 <새벽의 모든>은 ‘저녁 해가 지고 나면 반드시 아침 해가 뜬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원작의 이 한 문장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다만 영화는 새벽이 도래하기 전 밤의 시간에서의 가능성을 더 깊고 넓게 탐구한다.

“공황장애 되고 좋았던 점은 없어?”

영화는 후지사와가 월경전증후군(PMS)으로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고, 공황장애를 겪는 야마조에의 삶도 마찬가지로 쪼그라들게 된 과정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쿠리타 과학 회사에서 선후배로 만났지만 친밀하진 않다. 한 프레임에 담기더라도 둘 사이의 거리감은 도무지 좁혀질 것 같지 않은 모양새다. 이들 사이에 연결점이 생긴 건, 이들과 관계없는 그리프 케어 모임이 등장한 이후부터다. 야마조에의 전 상사와 쿠리타 과학 사장이 같은 모임의 멤버인 것이 밝혀지고, 발작을 겪은 야마조에에게 후지사와가 자신의 PMS를 공유하면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던 인물들 사이에 미약한 연결점이 생긴다. 하지만 일정 선 이상 가까워지진 않는다. 후지사와가 야마조에와 종종 같이 시간을 보낼지라도 연인으로 발전할 여지는 전혀 없다는 것이 이들 대화와 제스처에서 반복해 강조된다. 요컨대 가족도 연인도 아닌 동료라는, 필연적으로 거리감이 내재된 관계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에 영화는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민다. 자신을 내보일 생각이 없던 초반과 다르게 두 사람은 PMS와 공황장애의 힘듦을 가감 없이 공유한다. ‘동료’의 관계는 시공간을 초월해 확장된다. 플라네타륨 시연을 준비하던 야마조에가 세상을 등진 한 회사 선배의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베텔게우스가 500년 전에 발산한 과거의 빛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과거의 빛인데 올려다보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카세트테이프에 기록된 선배의 목소리는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내레이션으로 대체된다. 선배의 말대로 “사람은 사라지지만” 그의 기록은 남아 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새벽의 모든>에선 도쿄의 야경이 몇 차례 반복된다. 색도 크기도 제각각인 도시의 불빛은 별에 관한 정보를 읊는 내레이션과 합치되며 자연스레 우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를 야마조에와 후지사와가 유유히 걸어간다.

야마조에와 후지사와의 대화에서 요철처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야마조에 집에 놀러온 후지사와가 “공황장애 되고 좋았던 점은 없어?”라고 건넨 질문. 야마조에는 그 질문이 성립 가능키나 하냐는 듯 반문한다. 농담처럼 지나가는 이 장면, 그리고 질문을 건넨 후지사와의 진위는 <새벽의 모든>이 견지한 태도와 일면 상통한다. 애초 발생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느 날 사고처럼 일어난 PMS와 공황장애, 그리고 타인의 죽음. 끝을 알 수 없는 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마야케 쇼 감독은 가족도 연인도 아닌 타인과의 느슨한 연대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새벽의 모든>이 묘사하는 관계는 성좌의 형태와 닮았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과거의 선배, 그리고 그리프 케어 모임 멤버 모두 개별로 존재하는 동시에 가상의 선으로 이어진 별자리처럼 연결돼 있다. 원작이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쿠리타 회사 사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서술된 것을 상기할 때 영화에서 창조된 인물의 목표는 명확하다. 더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는 것. 그리프 케어 멤버들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공유한다. 쿠리타 과학 회사의 사장 역시 이곳에서 동생의 죽음에 관해 실토한다. 동생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기록들, 그가 가졌던 신념은 야마조에와 후지사와에게 시야를 넓힐 계기가 되어준다.

후지사와가 공황장애에 관해 질문한 시점을 기준으로 전반부, 후반부에 야마조에 집 안에 카메라를 위치시켜 현관문을 바라보는 신이 두번 나온다. 전반부의 장면은 발작을 일으켰던 야마조에를 걱정하며 후지사와가 찾아온 순간, 후반부는 야마조에가 이직한 지 한달이 지난 시점의 신이다. 두 장면 모두 비슷한 각도의 이미지지만 후반부 장면에는 야마조에의 내레이션이 덧붙여졌다. “함께 일을 했던 동료와 상사, 모두 멀리 가버렸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후지사와는 떠났지만 그것이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진 않는다. 야마조에는 더이상 혼자 집에 틀어박혀 어둠의 시간을 버티려 하지 않는다. 반복해 보여주는 공간. 그곳을 바라보는 인물의 위치도, 시선도 명확히 달라져 있다.

미야케 쇼 감독은 자신의 연출작에 함께 작업하고, 그 결과물을 같이 관람하는 이들을 등장시키곤 한다. <와일드 투어>와 <새벽의 모든>에서 그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공통점은 완성된 작업 자체보다 프로젝트에 몰입한 인물들의 얼굴, 일을 거듭하며 달라지는 관계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와일드 투어>에서는 워크숍에 임하는 학생들, 이들이 수집하고 찍어온 촬영본을 같이 편집하는 움직임이 중요하게 담겼다. <새벽의 모든>에서도 학생들이 촬영한 쿠리타 과학에 관한 다큐멘터리, 플라네타륨이 구현한 우주의 전경보다 삼삼오오 모여 다큐멘터리를 관람하는 회사 직원들, 플라네타륨 시연을 준비하는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시연 참여자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더 길게 잡힌다. 미야케 쇼 감독은 타인들이 뭔가를 공유하고, 그 경험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목도하는 것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듯 보인다. 한곳에 모여 영상물을 바라보는 군중은 한편으론 영화관 속 관객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무언가를 공유하며 관계 맺는 시간의 의미는 <와일드 투어>를 거쳐 <새벽의 모든>에서 한층 더 강화됐다.

자전거에 오르며

<새벽의 모든>은 인물들이 겪는 고통, 어둠의 시간을 깊이 들여다보면서도 틈틈이 이들의 변화에 주목한다. 어느 날, 야마조에는 아파서 조퇴한 후지사와에게 짐을 가져다주기 위해 회사를 나선다. 공황장애로 지하철에 오르지 못하는 그는 대신 자전거에 오른다. 심박수가 오르면 발작이 일어날까 조심하면서 야마조에는 페달을 밟는다. 오래전 후지사와가 건네준 자전거를 타고, 야마조에는 후지사와를 돕기 위해 길을 나선다. 짐을 전해준 이후로도 야마조에는 처음으로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동네를 순환한다. 야마조에와 멀리서 그를 좇는 카메라. 그 사이엔 빛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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