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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당신의 얼굴
김사월 2024-10-10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거기엔 누군가의 얼굴이 있습니다. 와, 언제 이렇게 변했지? 낯선 저 얼굴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고현정 선생님이 어디선가 말씀하신 게 떠오릅니다. 세수할 때 얼굴을 너무 자세히 보지 말라고요. 늘어나는 잔주름과 세월의 흔적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나의 전반적인 인상이 어떠한지만 확인하라 하셨지요. 우리는 그녀에게 아름다움의 비결과 세안 방법을 알려달라고 질문하지만 사실 해줄 수 있는 대답이 딱히 있을까요. 분하지만 아름다움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인 걸요. 어리석은 질문들에 그녀가 해줄 수 있는 현명한 대답은 어쩜 이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전반적인 인상이라… 다시 거울 속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아, 뭔가 젊음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한데, 그래도 이젠 꽤 사용한 것 같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엔 이 얼굴에서 문득 노인의 얼굴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놀랍고도 심란하지만 묘한 쾌감이 있습니다. 끝이 안 날 것 같은 이 지루하고 기나긴 인생이 어떤 식으로든 흘러가고 있다는 이상한 안도감입니다. 뭔가 뽐내고 표독스럽게 살았던 날들은 지나고 나니 민망해지더라고요. 에너지가 빠져나가며 피곤하고 차분해지는 얼굴도 조금 기대됩니다. 살면 살수록 더 살고 싶어지는 저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미워 죽겠던 나의 어린 시절의 얼굴이 이제는 우습게도 그리워서 거울 속에 그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지 살펴봅니다. 앗, 역시 너무 자세히는 아니고 전반적인 인상으로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거기엔 히라야마 역을 맡은 배우 야쿠쇼 고지의 웃는 듯, 우는 듯, 서글픈 듯, 강인한 표정이 있습니다. 가야만 하는 길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살아가는 동안 매일 짓는 우리의 표정입니다. 감정이 평생토록 지나다니며 연주한 흔적이 남은 주름진 그의 얼굴은 너무나 강렬해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나도 그와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항할 겨를 없이 감동받고 나니 그가 한번 더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번에는 14년 전의 그의 얼굴이 담긴 <쉘 위 댄스>로요. 아시죠? 본 지 10년이 넘은 영화는 새로운 영화입니다. 인간의 망각이 축복으로 쓰이는 지점이지요. 나도 세상도 그동안 변했으니 새로운 시점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2000년으로 돌아가서 핸섬한 아저씨 느낌의 야쿠쇼 고지를 만나봅니다. 곧은 자세이지만 약간 엉거주춤한 포즈와 강인한 턱, 진한 눈썹과 특유의 눈빛을 새삼 다시 바라봅니다. 아직 주름지지 않은 그 얼굴을 보며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애상을 느낍니다. 14년 전이건 조금 전이건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힌 그때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지요. 태어나고 살아가고 늙어가는 인간에 대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낍니다.

가수 일을 하면 그때그때가 기록되는 사진이 생겨서 내심 곤란할 때도 있지만, 저로서는 기록에 남은 얼굴과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다 갔다는 기록이 남는 게 가끔은 좋다는 생각도 들고요.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작품마다 우리의 얼굴이 다르게 생긴 것 같다는 거죠. 그렇게 느껴지는 건 다소 몇년간의 시간차도 있고 연출한 캐릭터의 외향이 달라서도 있겠지만 아마 이입하고 있는 표정이 달라서지 싶습니다. 그때의 그 눈빛으로 무얼 담고 기억했을까요, 무얼 애잔하게 맡고 어떤 것을 맛보고 사랑했을까요. 얼이 들어 있는 굴이라는 것이 매분 매초 변화합니다. 눈 깜빡이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있으시다면 아시겠지요. 곧 달아날 이 순간의 얼굴이 카메라에 담겨 남겨진다는 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제가 아직 당신의 얼굴을 기억한다면 부담스러우실까요? 미안하지만 가지런한 속눈썹과 뺨이 볼록한 모양, 콧구멍, 특이한 곳에 있던 점 같은 세밀한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매 순간 충실히 바라보았기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네요. 이제는 바라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얼굴, 다른 세상으로 떠나서 사라진 얼굴, 그렇게 제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사랑했던 얼굴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함께하던 때로 너무나 쉽게 돌아가곤 합니다. 그 하나뿐인 모양들에 저는 우리의 기억을 저장해두었으니까요. 궁금합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내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럴 때는 인터넷에 최근 나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못내 억울하게도 느껴집니다.

혹시 빛과 소금의 <오래된 친구>라는 노래를 좋아하시나요? 이 노래는 “미스터박 미스터장, 우리는 오래된 친구”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친구에게 약식으로 미스터 아무개라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 구식이면서도 순수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죠. 9월 초에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그들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연에 참여한 김사월 밴드는 우리 순서를 잘 마치고 마지막 팀인 빛과 소금의 공연을 봤습니다. 그들은 이런 멘트를 했습니다. 빛과 소금의 미스터 박, 박성식과 미스터 장, 장기호는 여덟살, 국민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함께 음악을 한 지는 35년이 넘었다고요. 성격은 다르지만 마음은 아주 잘 통한다며 그렇게 노래 <오래된 친구>를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요? 살짝 오래된 친구이기도 한 김사월 밴드는 극장 맨 뒷좌석에 쪼르르 앉아 있었는데 저와 키보디스트(이설아)는 그 순간 놀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았습니다. 이 노래가 그런 노래였어? 이토록 오랜 시간을 지나온 서로 위한 주제곡을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김사월 밴드의 반은(저 포함) 울고 반은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제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두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우리는 한숨 비슷한 감탄을 내뱉으며 그들을 노래를 반복 재생했습니다. 거의 화가 난 듯이 감동을 발사하고 있는 우리의 얼굴은 아직 말갛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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