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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절호의 기회에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 장성범, 서석규, 김도영
정재현 사진 최성열 2024-10-01

한양중공업 입사 4년차 강준희 대리(장성범)는 인사팀으로 부서 이동을 명받자마자 구조조정 업무에 투입된다. 이미 일이 손에 익은 이동우 차장(서석규), 정규훈 팀장(김도영)과 준희는 함께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지만, 이들이 사내에서 ‘해야 할 일’을 대하는 숙련도와 마음가짐은 전부 다르다. <해야 할 일>은 부당해고된 노동자의 쟁의를 다룬 숱한 노동영화와 달리 노동자를 해고하는 또 다른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또 <해야 할 일>은 수많은 영화에서 조·단역으로 잠시 스쳤던 배우들을 주연으로 내세운다. 늘 역량보다 작은 배역을 연기하며 재능을 펼쳐 보일 계기를 갈구했던 배우 장성범, 서석규, 김도영은 찾아온 절호의 기회 앞에 고대하던 선물을 수령한 듯한 설렘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들이 누린 기회가 단 한번의 요행이 아님을, 세 배우가 분한 배역은 각자의 ‘적역’임을 흔쾌히 동의할 수 있다. <해야 할 일> 이후로 보여줄 다양한 얼굴을 기꺼이 궁금하게 만드는 세 낯선 배우, 장성범, 서석규, 김도영과의 대화를 전한다.

장성범

- 박홍준 감독이 <해야 할 일>의 캐스팅 기준은 ‘낯선 얼굴이 많았으면 좋겠다’였다고 전한 바 있다. <해야 할 일>과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하나.

장성범 영화 <어브로드>와 시리즈 <신병> 촬영을 마쳤을 즈음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상업영화에서 조·단역으로 분할 때 느끼는 역할, 상황의 한계가 있다. <어브로드>에 이어 이번 작품이 내가 가진 연기 역량을 전부 발휘할 기회가 되리란 확신이 들었다.

서석규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야 할 일>의 출연 제의를 받았다. 캐스팅 연락을 줬던 조감독님과는 이전에 오디션을 봤던 다른 작품을 통해 알던 사이였다. 그 작품의 캐스팅 전화일까 해서 오전 10시에 부랴부랴 전화를 받았는데 아니더라.

김도영 나도 동일한 조감독님으로부터 처음 연락이 왔다. 당시 대학로를 떠나 매체 연기에 도전한 지 3년 정도 됐던 때고, 캐릭터를 탐구할 수 있는 배역이 아닌 의사, 교수 등 직업으로만 기능하는 단역을 전전하던 때라 일에 회의를 크게 느끼던 시기였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카페에 갔다. 체감상 거의 반나절을 시나리오를 열어보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막상 연기할 거리가 많은 배역이 매체에서 주어지니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일더라.

- 세 배우의 등장 숏이 전부 다르다. 장성범 배우는 앞모습으로, 서석규 배우는 뒷모습으로, 김도영 배우는 옆모습으로 작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에 담긴 본인의 얼굴 중 유독 마음이 가는 이미지가 있나.

서석규 크랭크업 전후로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래도 동우 또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 피로에 절어 있어도 괜찮겠더라. 막상 영화를 보니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어 경악했지만!

장성범 준희를 연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시도했다. 표정이나 동작을 최소화한 채 카메라 앞에 가만히 서는 게 소위 말하는 열연보다 힘든데, 이에 도전할 절호의 기회였다. 카메라 앞에서 잘 나오려는 욕심도 거의 버렸다. 그래서 감독님이 확인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모니터도 거의 하지 않았다. 욕심을 버려서 그런지 영화에 담긴 내 모습에 큰 불만이 없다. 이 작품을 통해 나의 가장 순수한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김도영 내 얼굴이 오래 나온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동안 한번도 언급하지 못했던 분이 있다.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담당한 김미정 실장이 규훈의 안색을 만드는 데 공이 컸다. 작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규훈의 컨디션을 섬세하게 살려서 외양을 꾸며줬다. 나와 함께 연기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 정규훈 인사팀장이 처음 한양중공업의 임직원들을 모아놓고 구조조정 단행의 배경과 절차를 프레젠테이션하는 장면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직원들이 웅성이며 동요하는 와중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와 몸짓으로 사측의 주장을 관철한다.

김도영 부산 수리조선소에서 열흘 정도 촬영한 뒤 서울에 와 영화의 나머지 장면을 찍었다. 프레젠테이션 장면은 서울에서 찍었다. 이미 규훈이란 캐릭터와 열흘간 함께였기 때문에 내 안에 규훈이 뱄던 참이었다. 사실 그 장면은 엑스트라를 많이 기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네번 나누어 찍은 컷을 이어 붙였다. 장면의 연결을 위해 같은 동작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중요했다. 아마도 규훈의 딱딱한 태도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을까.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제할 수밖에 없는 촬영 환경에서 정확한 움직임을 보여야 했으니 말이다.

서석규

- 중간관리직의 이동우 차장은 인사팀 내에서 가장 많은 실무를 도맡는다. 업무에 능숙하고 사내에서 부조리를 마주해도 익숙한 듯 따른다. 숙련된 실무자처럼 보이도록 연기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을 듯한데.

서석규 살면서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동우와 달리 엑셀을 다뤄본 경험도 없다. 그래서 내 연기가 어설퍼 보이진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결국 연습밖에 없더라. 실제 인사팀 근무 경력이 있는 감독님께 엑셀 변환키, 단축키 등 여러 활용법을 배우며 열심히 훈련했다.

- 준희의 여자 친구 재이(이노아)는 “뭘 잘못했으면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이라 준희를 평한다. 재이의 대사를 포함해 준희를 연기하는 데 도움을 얻은 작품 속 요소가 있다면.

장성범 감독님의 경험이 준희에 많이 투영됐다. 아마 재이의 그 대사도 감독님이 형수님에게 그런 말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했다. 그렇다고 감독님에게 준희에 관해 많이 묻지도 않았다. 준희가 주인공이긴 해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준희는 자신에게 무작정 닥친 이야기에 반응하는 게 훨씬 중요한 캐릭터다. 무얼 애써 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배우의 연기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 준희가 규훈에 의해 사내 직무 변경 이전 동료였던 이상수 과장(김남희)과 장일섭 부장(강주상) 중 보다 쓸모 있는 직원을 골라낸다. 그가 마주한 잔인한 상황 중 하나다.

장성범 관객 입장에서도 ‘내가 준희라면 장 부장과 이 과장 중 누굴 자를까?’라는 고민이 들 법한 상황이다. 보기에도 너무 힘든 장면이지 않나. 나 역시 정해진 대사를 뱉지만, 지금의 준희를 만들어준 두 선배 중 누굴 고르는 게 맞을지 끝없이 회의한다. 언론·배급시사회 때도 한 기자로부터 “장성범 배우가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둘 중 누굴 고를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지만 그게 인사팀 직원이 처한 인간적인 현실이다. 내가 뭐라고 누굴 해고하는 데 결정권을 행사하나 싶다가도 돌아서서는 해고 대상자가 내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냐며 안도하지 않을까.

- 희망퇴직 면담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기 전 규훈이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잠시 근심하다 바로 업무 모드로 전환하는 순간이 클로즈업으로 담겨 있다. 냉혈한처럼 보이는 규훈에게 영화가 잠시 곁을 내어주는 장면인데.

장성범 명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김도영 정작 나는 촬영할 때만 해도 힘을 주어 연기하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으면 안될 것 같아 3초 정도 눈을 감고 있었다. 정작 감독님이 “선배님 더 감고 계셔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하더라. 감독님이 7초 정도를 이야기하길래 좀더 감아봤다.

김도영

- 서석규 배우는 올여름 <행복의 나라>로 출발해 <문경> <딸에 대하여> <해야 할 일>, 곧 개봉할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까지 거의 2, 3주 간격으로 출연작이 극장에 걸리고 있다.

서석규 나머지 네 영화의 등장 분량을 합해도 <해야 할 일>의 비중보다 적다. 단역을 주로 맡다가 <해야 할 일>에서 처음으로 크레딧 두 번째에 이름을 올리는 비중 있는 배역을 연기하게 돼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지금껏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들은 시사회까진 초대가 돼도 개봉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불리거나 영화제에 정식으로 초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로 누리는 축제도 곧 끝날 터다. 다시 내 자리를 잘 찾아가려 한다.

- 김도영 배우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김구경, 민구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무엇이 본명인가.

김도영 이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실어주면 좋겠다. 세 이름 중 본명은 김구경이다. <챔프>(2011)에 출연했을 당시 어머니가 내 사주에 관(官)이 많아 이름을 바꾸길 추천했고 1년 정도 김도영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포털사이트에 김도영을 검색하니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 겸 배우가 뜨더라. 참고로 그 누나와 한때 굉장히 친했다. (웃음) 이미 같은 이름을 쓰는 배우가 있어 본명으로 쭉 활동하다 어머니가 또 이름에 ‘민’이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하셔서 한동안 민구경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아내와 하던 사업이 자꾸 어그러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머니가 한번 더 “넌 김도영이 좋았어”라고 하시더라. 이렇게 살아도 어렵고 저렇게 살아도 고꾸라질 거라면 어머니 말이라도 잘 듣자 싶더라. 지금은 아예 김도영으로 개명했다.

- 장성범 배우는 최근 시리즈 <신병>의 김동우 역할로도 주목받았다. 한 배역을 여러 시즌에 걸쳐 오래 연기한 경험은 어떻게 기억되나.

장성범 한 캐릭터를 오래 연기한다고 해서 이전 촬영의 아쉬움을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내가 실수를 메꾸려 하는 유의 사람도 아니고. 두 시즌에 걸쳐 김동우를 연기하긴 했지만, 회당 러닝타임이 통상의 시리즈보단 짧아서 두 시즌을 합친 게 미니시리즈 한 시즌 정도의 분량이다. 아직 동우가 펼쳐갈 이야기가 더 많아 다음 시즌이 궁금하다.

- <해야 할 일>은 9월29일까지 전국 11개 지역의 20개 독립예술영화전용극장에서 순회상영을 통해 각지의 관객들을 만났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부산국제영화제부터 전국의 영화제들을 다녔던 일을 포함하면 두 차례 순회상영을 가진 셈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

서석규 전국일주를 하는 기분으로 순회상영을 다녔고 덕분에 다양한 관객들을 만나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다. 앞서 말했듯 이젠 다시 내가 처한 현실을 파악해 제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살려고 한다. <해야 할 일>의 동우를 만났을 때, 이 작품을 통해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내게 주어진 큰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뿐이었는데 내 의지와 다르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 서러웠다. 동우에겐 영화 바깥의 자연인 서석규의 감정이 일부 뒤섞여 있기도 하다.

김도영 명필름의 이은 대표님이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의 불평형이 심하니 이 격차를 줄여보자는 취지로 순회상영을 기획했다. 소재가 다양한 독립영화를 많이 찾아주면 상업영화 제작자들도 영화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리라 믿는다. 배급 규모가 압도적으로 차이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독립영화의 상생을 위한 정책적 지원도 일부 필요하다고 본다.

장성범 의정부시에 사는데 의정부 시내 그 어떤 극장에서도 <해야 할 일>을 개봉 1주차에 상영하지 않는다.

김도영 장인, 장모님도 남양주시에 산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을 보려면 서울 노원구까지 여정을 떠나야 한다. 심지어 하루에 딱 한 회차 있는 상영시간도 보러 와주십사 부탁하기도 송구한 오전 9시30분이다.

장성범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공개했던 <어브로드>도 아직 영화진흥위원회 개봉지원사업에 들지 못해 한국보다 미국에서 먼저 개봉할 판이다. 보다 많은 분들이 독립영화를 찾길, 그리고 독립영화를 보러 오는 기회가 손쉬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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