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레이날도 아레나스(하비에르 바르뎀)는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성장한다. 카스트로 혁명이 발발한 뒤 레이날도는 아바나 대학에 입학해 문학적인 재능을 키워간다. 작가로서 데뷔작을 발표하고, 레이날도는 동성애자로서 주변 남자들과 거리낌없이 몸을 섞는다. 카스트로 정권은 레이날도에게 족쇄 같은 존재가 된다. 1960년대 쿠바 정권은 예술가와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정책을 발표한다. 많은 예술가와 동성애자들이 ‘혁명의 적’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레이날도는 감옥으로 보내지고 편지 대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틈틈이 옥중에서 쓴 글을 감옥 밖으로 보내는 데 성공하지만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레이날도는 더욱 극한 처벌을 받는다.
■ Review
어떤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까지 5천명이 넘는 남성과 잤다.”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물론 동성애자다. 도덕관념이라곤 없고 술과 파티, 쾌락을 즐긴다. 정치 현실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혁명정권이 들어서고 휘황한 구호와 선전선동이 판을 치지만 전혀 남 일처럼 개의치 않는다. 당연하게도, 이 남자는 혁명에 적대적이며 자신이 속한 남성사회에서도 철저하게 따돌림당한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인 것에 대해 가족들의 반응은 영 탐탁지 않다. 남자가 가야 할 길은 명백해 보인다. 일단 지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비포 나잇 폴스>는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목표에 도달하려는 한 남자의 몸부림의 기록이다.
<비포 나잇 폴스>는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다. <비포 나잇 폴스>의 출발은 소박하다. 학교교사로부터 “이 아이는 문학에 재능이 있어요”라는 칭찬을 받는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는지 보여준다. 아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문학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심사위원은 “넌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어”라고 귓속말한다. 평탄한 대로가 앞길에 놓인 것만 같다. 하지만 혁명의 시대가 시인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동료 문인들은 TV에 나가 인민재판과 다름없는 무대에서 자아비판을 하며 동성애자들은 거리에서 두들겨맞는다. 감옥으로 끌려간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환상, 자유의 이미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남은 건? 탈출이다.
어쩌면 <비포 나잇 폴스>는 정치적인 영화로 오인될 소지도 있다. 정권과 시대에 박해받는 시인, 혹은 쿠바혁명의 어두운 이면 들여다보기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문제적 인물의 삶이 다른 공간으로 옮겨진 뒤에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한 뒤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동성애자로 낙인찍혀 고국에서 추방당했다) 문학천재는 끝없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섹스와 쾌락에 탐닉하면서 자기파괴에 몰두한다. 그제야 우리는 평온함이란 애당초 그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비포 나잇 폴스>는 천형(天刑)으로서 유배와 환각, 그리고 심각한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의 전기영화다.
영화의 시각적 양식은, 황홀하다. <비포 나잇 폴스>의 진정한 힘은 영화의 스타일이 다른 어느 작품의 예를 따르지 않고 독창적이라는 데 있다. 색채와 카메라 움직임, 쿠바산 맘보 리듬을 담은 음악의 조화는 영화를 풍요롭게 한다. 카메라는 자유를 꿈꾸는 쿠바인이 거대한 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여행에 동반한다. 기구가 궤도에 오르고 발밑으로 아득하게 지상이 보이기 시작하면 카메라는 아예 공중에서 누워버린다. 그리고 지상을 굽어본다. 몽환적인 시점숏의 완성이다. <비포 나잇 폴스>에선 이렇듯 멋진 장면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건 이유가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영화에서 주인공은 레이날도 아레나스, 그리고 그를 둘러싼 ‘공기’다.
남미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열기가 섞인 공기. <비포 나잇 폴스>는 한 예술가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흐름을 담는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라는 권력으로, 근사한 외모의 남자의 유혹으로 모습을 변신한다. 영화 막바지에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자신이 숨쉬는 공기를 스스로의 의지로서 차단한다. 힘겨운 작업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그는 “난 평생 너 같은 진정한 친구를 둔 적이 없었어”라고 고백한다. 죽음은 그에게 다시 없는 달콤하면서도 숨통을 틔워주는 구원인 것이다. <비포 나잇 폴스>는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화가로서 캔버스에 붓칠을 하던 그는 영화 <바스키아>(1996)로 스크린으로 작업무대를 옮겼다. <바스키아>에서 그랬듯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특정 인물의 삶을 가감없이 스크린에 투사한다. 주로 그것은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나열하고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하고 오만한 인간의 비상과 몰락에 관한 짧고도 강렬한 스케치다. “레이날도가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레이날도는 많은 것을 말하고자 했다. 고통이 위대한 미로 승화된 것이었다”라고 감독은 소견을 밝힌다. 영화는 2000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
▶ 비포 나잇 폴스 / 김의찬
▶ <비포 나잇 폴스> 배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