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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동'이라는 이름의 파동, <해야 할 일> 박홍준 감독
정재현 사진 오계옥 2024-09-26

- 실제 조선소 인사팀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라 들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조선소에서 근무했다.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놀러갔다 영화의전당에서 영화 수업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됐고, 단편 시나리오 강좌를 듣던 중 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처음 일었다. 이후 제작 워크숍을 통해 3년간 단편 작업에 집중했다. 제작 워크숍을 듣던 때가 영화의 배경인 2016년 하반기다. 모두가 아는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시위가 있던 시기다. 공교롭게 그때 조선업도 전세계적 불경기를 겪어 많은 구조조정과 폐업이 있었다. 회사 안에선 처음으로 구조조정을 겪고, 회사 밖에선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을 동시에 겪으며 무력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영화를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 영화화를 위해 다시 산업 전반을 취재하는 과정은 어땠나. 내부자로 있을 때와 외부자로 구조조정을 바라볼 때 달리 세우게 된 관점도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업은 다시 호경기를 맞았다. 배의 수명, 유가 문제 등의 이슈로 변동 폭이 클 수밖에 없는 산업인데, 내가 일할 땐 중국쪽 조선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물동량을 저가로 수주하는 등 양국간 치킨 게임이 벌어져 불황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업이 다시 호황이라고 해도 업계를 떠난 노동자가 많아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20년 전만 해도 주목받던 일자리인데 산업구조 변화와 뉴스에 끝없이 나온 빈번한 구조조정이 직종에 관한 인상을 바꾸지 않았나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점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시나리오의 초고를 쓸 때 자료 조사를 성실히 했다. 내가 겪은 일이 근무지만의 특수성일 수도 있으니 다른 구조조정 판례나 보도자료도 교차 검증하며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거쳤다.

- 인사팀의 다섯 팀원이 구조조정이라는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부 다르다.

처음부터 인물과 인물이 지닌 입장이 동시에 탄생했다. 가령 경연(장리우)의 설정이나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둔 채 시나리오를 썼다. 경연은 전졸(전문대 졸업) 여직원이라는 딱지를 떼고 싶어 굉장히 노력한 사람이다.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대리 직급까지 단 채 열심히 회사 생활을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전졸 여직원으로 묶여 별도 취급된다는 사실에 분노와 허탈함을 느낀다. 규훈(김도영)도 냉혹하고 차가운 인사팀장처럼 보이지만, 회사를 아끼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뜨거워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한다.

- 조선소의 외경이 시간 전환의 표지로 사용된다. 그런데 원색 크레인의 수직적 이미지나 기계의 금속성, 바다의 이미지가 구조조정이라는 영화의 소재와 결합하니 묘하게 비정한 정서를 전달한다.

처음에는 평범한 회사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 시간이 흐를수록 금속 특유의 날카로움과 위태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신경 써 컷을 안배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겨울의 찬 공기까지 화면에 반영하면 좋겠다 싶었다. 조선소가 쇠붙이만 있는 곳이다 보니 금속의 차가움이 영화의 계절감과 붙었을 때 발생하는 쓸쓸함, 비정함이 잘 맞물릴 수 있도록 했다. 때마침 영화 촬영도 11월부터 12월에 이루어졌고, 실제로 현장이 몹시 추웠다. (웃음) 몇몇 인서트들은 후반작업 중 추가 촬영했다.

- 본인의 직무 능력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사용된다는 점이 주동인물인 준희(장성범)의 맹점 아닐까. 준희는 인사팀이 아닌 다른 부서에 배정됐어도 일머리를 타고난 노동자였을 것이다. 스프레드시트를 잘 다루고, 성실하고 글도 잘 쓴다.

아무래도 준희에 내가 많이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안 그리려 무지 애썼다.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면 얼마나 매력이 떨어지겠나. (웃음) 그래도 준희는 생각할 줄 아는 캐릭터라는 걸 유념해두고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해야 할 일>은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쓸 때 거듭 신경 쓴 나만의 가이드라인이기도 했다. 준희는 회사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사회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등을 빚는다. 그렇게 평생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성실한 직원이라는 점을 주지했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에 살짝 발을 담갔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부조리에 관해 학교 선배들에게 힘듦을 토로하면 다들 “다 그렇게 산다. 네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할 일이다”라는 답밖에 들려주지 않더라. 그때 느끼는 허무가 정말 컸다. 여전한 감정이 준희에게 자연스럽게 반영됐을 것이다.

- 준희가 장 부장 딸의 전화를 받고 울컥하는 장면은 감독님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라고.

작품 전반이 건조한 이야기라 감정적으로 동하는 포인트가 한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포인트를 고민하던 중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인사팀에 있으면 카드 회사, 은행 등 여러 곳에서 재직 확인 전화가 정말 많이 걸려온다. 그날도 모 직원의 보직을 묻길래 당연히 숱하게 받은 재직 확인 전화라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희망퇴직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후 회의실에서 대기 중인 직원의 자녀로부터 온 전화였다. 전산상 아직 재직 중이라고 응대했더니 아버지의 마지막 출근에 꽃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아버지의 근무지를 모른다며 수화기 저편에서 울먹이더라. 그 전화를 들으며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경험을 언젠가 내 영화에 녹여야겠다고 다짐했다.

- 거칠게 양분하면 <해야 할 일>은 노사 중 노측의 이야기가 아닌 사측의 이야기다. 신중한 재현을 누구보다 고민했을 것 같다.

인사팀 직원들 역시 회사에서 살아남아 자신과 가정을 부양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을 할당받은 것뿐이다. 개인적인 감상인데 제조업 분야엔 노사를 분리할 수 없는, 묘한 중간 지대가 있다. 제조업 기반 분야는 한국의 노동쟁의 역사에서 1970년대부터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나. 생산직 종사자들이 파업하면 사무직, 기술직을 포함한 관리직은 파업을 막아서기도 했다. 그런데 크게 보면 생산직도 관리직도 모두 직장에 계약된 노동자다. 관리직도 노동자인데 왜 이들은 노조를 결성할 생각을 하지 않고 회사를 믿다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당할까. 아직도 이런 기조가 남아 있는 회사들도 있다고 들었다. <해야 할 일> 속 인사팀 직원들도 사무직이 노조를 결성한다는 것을 백안시한다. 노측과 사측 중간 지대에서 목소리를 내려 해도 어디에도 힘을 싣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은 그 묘한 중간 지대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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