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소녀성의 소유자이면서, 전생을 기억하는 것 같은 웅숭깊은 눈동자를 천천히 끔뻑이는 배우와 마주 앉았다. 무구해 보이는 첫인상 너머로 영민한 지력을 가다듬은 이 배우는 끊임없이 묻고, 쓰고, 감정과 목소리의 쓰임을 연구하면서 <파친코> 시리즈의 거대한 아우라 바깥으로 이미 저만치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유하자면 배우 김민하는 한쪽 굴곡이 비스듬히 기운 백자처럼 오묘하기에 아름답다. 그가 풍기는 깨끗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기백에 가깝다. 재일 한인 여성의 고된 삶을 그리는 배우가 조준한 지점이 희생의 서글픔이 아닌 특출난 강인함인 것처럼. 수년 만에 마주한 남편 이삭(노상현)의 이른 죽음을 마주하는 장면을 회상할 때 김민하는 이렇게 말했다. “선자라면 절대로 떠나는 사람 앞에서 울지 않아요.” 이토록 담담한 얼굴 아래 배우가 옮겨낸 정동은 굴곡진 역사만큼이나 들끓는다. 동세대 중 단연 정의하기 쉽지 않은 희귀한 체질의 배우. 속 깊고 현명한 언어를 지닌 김민하와의 대화는 제법 경쾌한 마지막 질문을 남겨둔 채 끝났다. <파친코> 시즌2 이후, 드라마 <조명가게>와 부산에서 첫 공개될 <폭로: 눈을 감은 아이>, 로맨스물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김종관 감독의 옴니버스영화 <낮과 밤은 서로에게> 등으로 분주한 행보를 이어갈 김민하에게 우리는 또다시 얼마나 놀라게 될까?
- 지난해 6월 촬영을 마친 <파친코> 시즌2가 8월23일 첫 공개됐다. 시즌2까지 나온 지금, 소속사도 없이 혼자 오디션을 8차까지 보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너무, 너무 잘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시간을 잘 보냈다는 의미에서. 오디션을 그렇게 즐겨본 게 어쩌면 처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 인터뷰에 들어갈 때마다 재밌었다. 그전엔 ‘어떻게 하면 날 더 보여줄까’에 집중했는데 <파친코> 오디션을 볼 때는 ‘오늘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좀더 진실하게 반응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대의 요구에도 순수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디션 과정이 길어지는 동안 틈틈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잘 견딘 자신을 이제는 조금 칭찬해주고 싶다.
- 혼자 글로벌 프로덕션을 상대하는 신인배우에게 어떻게 그런 담대함이 있었을까.
그때야말로 마음을 다 비운 상태였으니까. 다 관두고 유학 가려고 정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무언가를 깨달아가는 시기였다.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자는 걸 처음 배웠다고나 할까. 큰 오디션이고 중요한 기회인 건 맞지만 그게 내 삶을 마구 흔들도록 두어서는 안된다고, 일상을 잘 붙잡자고 되뇌면서 지냈다.
- 시즌1, 2의 촬영장에서도 그 에너지가 내내 이어졌나.그랬던 것 같다. 내 성향 중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덤덤함 혹은 침착함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함일 수도 있는? (웃음) ‘와!’ 하고 잘 신나 하지 않는 편이다. 선자라는 인물이 복잡한 역사적 격동과 감정을 내포한 인물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물론 나라고 일희일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러고 나면 스스로가 너무 힘들어서 중심잡기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파친코> 작업은 여러모로 내게 배우로서 갖춰야 할 균형감각 같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 시즌1의 마지막, 오사카에서 김치를 팔면서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선자의 모습부터 이야기해보자. 이후 7년이 흐르고 전쟁을 통과하는 동안 인생의 풍파만큼이나 인물도 더욱 단단하고 깊어졌다. 세월이 응축된 연기를 한다는 게 배우에겐 어떤 과제였을까.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시즌1에선 16살, 시즌2는 30살로 시작하니까 나는 선자의 14년을 통과한 셈이다. 이제 아이들은 자랐고 선자는 완연한 어머니가 됐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어떤 순간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천하무적의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엄마가 몰래 무너지는 모습을 어렴풋이 목격했던 기억이 난다. ‘너네 때문에 산다’ 같은 말이 참 싫기도 했다. 차라리 엄마가 자유롭게 자기만의 삶을 살기를 바란 적도 있다. 내가 딸로서 품었던 그런 의구심이 시즌2의 선자를 연기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된 것 같다. 선자에게는 정말로 가족이 전부라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일본에서 보낸 세월이 선자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혼자 일기처럼 쓰면서 나 자신에게 많이 질문하는 시간도 도움이 됐다. 다만 세월과 나이에 너무 얽매이지는 않으려고 했다. 인물을 마주한 상황 그 자체, 감정에 집중하는게 우선이었다.
- 이전 인터뷰를 보면 엄마와 할머니를 붙잡고 늘 질문하면서 선자를 연구했다는 대답이 자주 보인다. 예능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지구별 잡학사전>에서 보여준 면을 포함해 김민하는 질문하고, 일기 쓰고, 독서하면서 공부하는 데 익숙한 배우라는 인상이다. <파친코> 시즌2에서 선자를 향한 김민하의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이었나.
무엇이 그녀를 숨 쉬게 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선자가 생존하고 싶게끔 만든 희망에 대해 질문하곤 했다. 전쟁 중에 먹을 것도 없고 이삭은 죽고 갑자기 한수(이민호)가 나타나고…. 너무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 여자를 살린 게 무엇일까 곰곰이 더듬다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이더라. 떠난 이삭에 대한 사랑, 지켜야 할 가족에 대한 사랑, 심지어 한수에 대한 사랑까지. 다 사랑이었다. 시즌2에서 의외로 인물들이 웃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방공훈련을 하거나 전쟁 중 힘들게 농사짓는 상황에서 과연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순간순간 미소 짓고 거기서 빛을 찾으며 살아갈 힘을 낸다. 선자의 ‘파워풀’함은 거기서 나오는 것 같다. 사실 시즌1을 작업할 땐 선자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있었던 건 비록 우물 안 개구리지만 선자는 힘껏 점프할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었기 때문이다.
- 남편 이삭의 죽음은 <파친코> 시즌2에서 선자를 뒤흔드는 가장 큰 시련이라 할 만하다. 애틋한 재회와 이별 장면을 촬영하는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총 이틀에 걸쳐 촬영했다. 대본에는 선자가 이삭 앞에서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써 있었다. 이삭이 처음 집에 돌아왔을 때, 선자가 의사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 그 심정의 참담함을 느끼면서도, 선자라면 본인이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고 마음을 굳게 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삭이 눈을 감는 장면은 리허설 때부터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 같은 게 느껴졌다. 대본대로 하고 싶은데 아무리 애써도 잘 안됐다. 이삭이 “정말 살고 싶다”라고 이야기할 때가 특히 그랬다. 어떻게든 내 온기를 꺼내 그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분통함, 이삭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향한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선자가 이삭을 보면서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다는 사실까지 뒤섞여 강렬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최종적으로 쓰인 컷은 이미 앞서 한참을 울고 눈물이 쏙 빠진 다음에 찍힌 오케이컷이라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그래도 마지막에 그 컷이 쓰여서 다행이다. 선자는 정말로 떠나는 사람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 장면을 찍고 다음 세팅을 기다리는 동안 엄청나게 졸음이 쏟아져서 결국 처음으로 촬영장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 이삭과의 이별 외에 김민하에게 긴 여진을 남긴 장면이 있다면.
어머니 양진(정인지)과의 재회 장면이 떠오른다. 경북 의성이 로케이션이었는데, 논밭 진흙 속에서 모내기를 하다 말고 한수의 차에서 내리는 양진을 본 선자가 놀라서 뛰어가는 신이다. 질퍽거리는 흙 위를 끙차끙차하면서, 넘어져가면서 엄마를 만나러 달려간다. 십수년 만에 모녀가 재회하니 얼마나 애틋할까. 촬영 전에 엄마한테 물어봤다. 10대 때 헤어진 딸이 30대가 되어 있으면 멀리서 보고도 알아볼 수 있겠냐고. 엄마의 대답은 분명했다. 무조건 알아본다고, 실루엣만 봐도 알 거라고. 이어서 늦은 밤에 양진이 다 큰 딸을 목욕시켜주는 장면도 참 아름답다.
- 선자가 나이 들어갈수록 배우가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끌어다 쓸 여지는 적어지는 셈이다. 연기하면서 생소한 감정은 없었나.
모성에 관해서 그랬다. 시즌1에선 분만하는 장면이 내게 엄청난 경험이었다. 촬영 전까지 자녀가 있는 감독님, 주변 스태프들에게 ‘도대체 부모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하고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는데, 분만 장면을 찍고 나서 스스로에게도 신기한 감정이 싹텄다. 너무나 예민해져서 이 갓난아이를 누구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내가 완벽히 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시즌2에선 부모로서 자녀를 대하는 감정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점을 마주했고 그게 곧 과제였다.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노아는 대학을 안 간다고 억지부리는 상황이다. 그래서 노아와 선자가 약간의 갈등도 겪는데, 이 지점들이 참 어려웠다. 그 무렵 기억이 난 건데 예능 <바퀴 달린 집>을 촬영할 때 세 자녀의 아버지인 성동일 선배가 그러시더라. 부모는 항상 기다려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떠올려보면 내 부모님도 그러셨다. 그리고 이제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가늠해보게 된다. <파친코>를 찍으면서 미래에 한번 발 담그고 온 느낌이다. 선자에게 정말로 배운 것이 많다.
- 실제 김민하는 어땠나. 부모님에겐 공부 잘하고 야무진 모범생이 아니었을까.
뒤늦은 사춘기가 온 케이스다. 나도 노아처럼 속 썩인 순간이 많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공부만 했고 성적도 꽤 좋아서 부모님이 기대를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 뒤늦게 연극영화학과에 가겠다고 하고 20대 내내 연극, 단편영화 작업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지. 20대엔 마음이 급한 만큼 좁아져 있었던 것 같다. 욕심과 야망만큼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집에 가서 툴툴대고 심술도 부렸다. 선자를 만난 뒤에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하면서 부모님께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다.
- 선자의 목소리를 찾아나간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서울 출신인 데도 경상도 사투리를 너무나 훌륭하게 구사한다는 점, 시즌2에선 한층 더 깊고 낮은 톤의 소리를 구사하는 점이 돋보인다.
시장에서 소리도 많이 질렀을 테고 나이가 들면서 보통은 목소리가 좀더 가라앉는 점을 고려해 시즌2에선 소리를 좀더 낮게 냈다. 사실 사투리 연기가 정말 걱정스러웠다. 이건 처음 고백하는 건데, 약간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면서 톤을 낮추면 억양도 좀더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판단도 있었다. 선자의 사투리는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지만 내가 억양에 몰두하는 순간 연기가 흐트러질 수 있는 부분을 고려해야 했다. 핵심은 음가를 악보처럼 이해하는 거였다. 딕션의 완벽함보다는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춘 이유다. 경상도 출신인 정인지, 정은채 배우의 도움도 컸다. 대구와 부산 사투리는 어떻게 다른지부터 시작해서 ADR(후시녹음) 할 때까지 옆에서 코치를 해줬고 나는 그들에게 촬영 중간중간 일부러 사투리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 유튜브에서 학생 시절의 김민하가 무대에 올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본 적 있다. 그렇게 와일드한 목소리도 낼 수 있는 사람이란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걸 도대체 어떻게 본 거지! 성우를 꿈꾸기도 했고 목소리 공부를 하면서 소리에 워낙 예민하다. 사실 내 목소리는 원래 굉장히 하이톤이었다. 대학 다닐때까지만 해도 내 목소리를 싫어할 정도로. 개인적으로 낮은 음역대를 좋아해서 몇년간 훈련하면서 목소리를 찾아갔다. 어쩌면 나는 소리를 가지고 놀 때가 가장 재밌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꼭 더빙 작업과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
- 배우 되기 이전에 목소리를 가지고 노는 게 즐겁다고 느낀 첫 시작점은 언제였을까.
어렸을 때 만화영화나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면서 하루 종일 따라하는 애였다. 성대모사도 좋아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소리를 따라하는 게 내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놀이였달까. 그래서 한때 어린 내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고 부모님이 걱정이 깊었다고도 한다. 상상하고 발화로 옮길 때의 묘한 심리적 해소 효과도 있다. 누군가와 싸우는 상상을 하면서 내 소심함을 풀기도 하고, 오늘처럼 인터뷰를 앞둔 날이면 혼자 인터뷰도 해보고…. (웃음)
사랑, 타인의 우주에서 내가 배운 것
- 이민진 작가와 쇼러너 수 휴, 테레사 강 등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여성들의 활약과도 연관이 깊은 프로젝트다. 그들로부터 받은 힘이 있다면.
20년 넘게 미국에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그것도 남초인 할리우드 인더스트리에서 우뚝 선 여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건 엄청나게 영감을 준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떻게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건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주저하지 않고, 고정관념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대단히 자유롭게 행동하는 분들이다. 그리고 편견을 어떻게 돌파할지 굉장히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꼿꼿하게 자신을 세우고, 그러면서도 감싸안는다. 그들의 에너지에 내 마음도 자주 동요했고 무엇보다 의지가 됐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영어로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이 좀더 거리낌 없이 열린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떻게 하면 내 의견을 건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이를테면 당당해지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이었다.
- 미국 토크쇼나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파친코> 시리즈, 그리고 선자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 ‘내성적이고 소심하다’는 배우 자신의 묘사를 믿기가 힘들다. (웃음)
행사 직전까지 ‘토할 것 같다’고 스타일리스트 언니의 손을 잡고 있는데… 놀이기구 타는 것하고 좀 비슷하지 않을까? 직전까지 무섭다고 찡찡대지만 일단 탑승하면 어쩔 수 없고 오히려 즐기는 게 나은 것처럼. 그리고 일단 무대에 서면 두려움보다 책임감이 더 커진다. 내가 선자에 대해 말할 때 쭈뼛거리면 그건 인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선자에 대해 잘 설명하는 것까지가 내 몫이니까. 그러나 이도 저도 잘 안 통하면 일단 ‘나 몰라라!’ 하고 눈 질끈 감으면 된다.
- 올해 부산에서 첫 공개될 영화 <폭로: 눈을 감은 아이>의 예고편을 보고 놀랐다. <파친코>와는 극명하게 상반되는 온도의 캐릭터다.
언제까지나 선자로 살 수는 없으니까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파친코> 시즌1이 끝났을 때부터 주변에서 차기작에 관심을 가져주셨다. 내 판단은 오히려 차분히 시간을 갖자는 거였다. 내 색깔을 스스로 숙고하고 충분히 파악한 뒤에 움직이고 싶었다. <폭로: 눈을 감은 아이>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그리고 드라마 <조명가게> 모두 그런 고민 끝에 보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던 기회라 감사하다. <폭로: 눈을 감은 아이>는 촬영 초반에 목소리 톤이나 뉘앙스가 선자와 너무 비슷한 게 아닌가 싶어 내심 갈등도 했는데, 마무리한 지금은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구나’ 연구하는 유익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 아껴두었던 대망의 질문이다. 올해부터 <씨네21>에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라는 에세이를 연재 중인데 마감의 고충은 어떤가.
누군가에게 내 생각, 내 글을 보여주는 게 처음엔 너무 무서운 일이었지만 별거 아닌 이야기도 쓰는 사람이 정성스럽게 펼쳐놓으면 누군가에겐 공감할 만한 무언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한달에 한번 마감일이 너무나 빠르게 돌아온다. 그런데 그 정도 압박이 있는 게 참 좋다. 꾸준히 생각이 정리도 되고, 무엇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다루고자 한 대상들이 더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 지금처럼 <파친코> 프로모션 기간과 촬영 일정 등이 겹친 상황에선 한회 정도 잠시 쉬어가고 싶은 유혹도 있을 것 같은데.
절대! 그런 건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웃음) 평소에 머릿속으로 구상해놓고, 글 쓰는 날을 딱 하루 정해 방문 닫고 들어가 앉아 있는다. 마감이 직전이라고 생각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 같다.
- 얼마 전 특히 사랑에 관해 쓴 글이 아름다웠다. 연재를 거듭할수록 점점 솔직해지고 스스로에게 낱낱해지는 것 같다.
<파친코> 나올 시기여서 그랬는지 더더욱 사랑을 주제로 쓰고 싶어졌다. 이전까지 한번도 내 연애관이라든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어 글로 풀어보고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 쓴 <씨네21> 에세이 중 가장 오래 씨름한 글이라 이런 피드백을 받으니 정말 뿌듯하다. 혹시나 내 X들이 보면 어떡하지?, 너무 구차해 보이면 어쩌지, 독자들이 TMI라고 느끼진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 그 글에서 “앞으로 내가 가질 사랑의 형태가 궁금하다. 어떨까. 얼마나 예쁠까. 어떤 새로움을 또 마주하게 될까”라고 썼다. 지금까지 <파친코>의 선자가 김민하에게 남긴 사랑의 형태를 말해준다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그럼에도 인류애적 차원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걸 배웠다. 그런 커다란 차원의 사랑을 <파친코> 시리즈를 통해 감각했다. 몇만년 동안 쌓인 사랑의 힘이 돌고 돌아서 내게도 도착했다는 사실이 감동스럽다. 선자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그러니까 희망을 발견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누워야 하늘을 볼 수 있고 넘어져야 위를 볼 수 있다는 용기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