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페이스였을까? 기차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성진(강승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살. 택시는 눈부신 미래로 향하는 것일까? 햇빛이 따가웠는지 성진은 손으로 눈을 가린다. 이 숏이 잔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을 그의 입에 강력하게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왜 웃지 않는 것일까? 성진의 얼굴에 속 보이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입의 정도에 따라 성진을 대신해 우리는 그가 지었을 만한 표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숏은 관객의 신체적 반응을 일으킬 만한 강력한 힘을 지녔다. 성진의 직업은 연기자다. 하지만 택시라는 공간은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 무대가 아니다. 하지만 성진은 누구를 의식이라도 한 것일까? 관객은 유일한 목격자이자 김씨 가문의 비밀에 연루된 공모자가 된다. 성진이 들키고 싶지 않은 그 무엇. 성진의 입꼬리에 <장손>이 보여주지 않은 하나의 계절, ‘봄’이 잔인하게 맺힌다.
‘텅 빈’ 가족의 실체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장손>은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가족영화의 전형처럼 시작하는 영화는 갈수록 날카로운 질문으로 방향을 튼다. 결코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서 볼만한 가족영화가 아니다. 그런 영화는 임권택의 걸작 <축제>(1996)다. 두 영화 모두 한국의 멋진 자연 풍광을 정성스레 담아내고 한 가족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많은 면에서 <장손>은 <축제>를 참조하지만 이를 과감히 전복시킨 모범적인 사례다.
사각형의 틀에 면 보자기를 깔고 간수로 몽글몽글하게 응고된 콩물을 붓고 무거운 것으로 누르면 두부가 완성된다. <장손>은 가족을 두부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두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축제>와 닮았다. 치매로 고생한 어머니의 장례식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인다. <축제>는 가족 구성원들의 전사를 보여주는 플래시백과 영화 내 준섭(안성기)의 동화책 이야기를 통해 복잡하고 화려하게 대외적으로 비친 가족의 이미지를 벗기고 실체를 드러낸다. 영화는 그 모습을 프리즈프레임으로 화면을 정지시켜 가족사진으로 남긴다. <축제>는 가족이라는 틀 안으로 파편화된 가족 구성원들을 불러들이고 ‘가족’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사진으로 물질화시킨다.
<장손>에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제삿날 커다란 나무 밑에서 삼대가 모여 가족사진을 찍는다. 성진은 자신의 디지털카메라를 적당한 자리에 설치하고 할머니에게 원격 셔터를 넘긴다. 옷매무시를 다듬느라 분주할 때 할머니는 셔터를 누른다. 프리즈프레임으로 영화는 잠시 응고된다. 이때 카메라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축제>에서 가족사진은 준섭을 취재하러 온 기자의 필름 카메라로 찍은 가족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 한다면, <장손>에서 가족사진은 주관적인 셀카이며 후보정을 거쳐 그 내용이 변모하는 픽션의 현장이다. 가족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성진은 포토숍을 통해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고모부의 모습을 사진에 합성한다. <장손>에서 가족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아니라 가족이란 유명무실한 ‘틀’ 그 자체다. <장손>은 가족 구성원간의 끈끈한 유대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재확인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대(代)를 잇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영화에 가깝다. 두부 공장은 단지 이 가족을 떠받치는 기반에 불과하다. 누가 운영해도 상관없으며 대신할 누군가가 존재한다. 가업을 이어받음으로써 김씨 가문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잠결에 성진에게 들려준 자신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가 이 가족을 움직이는 내밀한 역사의 출발점이다.
안이 텅 빈 하나의 틀. 그것이 이 가족의 실체다. 이를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성진의 증조부모님의 묘다. 묘 안이 텅 빈 이유는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빨갱이들에게 학살을 당하고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할아버지는 부모님이 손목에 감긴 줄을 풀어주고 도망가라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고 고백한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본능적인 생존 욕구로 할아버지는 버텨온 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빨갱이에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한때 운동권이었던 아들과 계속해서 대립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DNA에 뿌리박힌 듯한 할아버지의 생존 본능은 손자 성진에게로 전수될 수 있을까?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 본능은 전수되지 못하고 실패했다. 삶의 목표 자체가 다른 두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아들 태근(오만석)이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고모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병원 생활을 하고 있기에 태근이 두부 공장을 맡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자 성진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며 위험한 제안을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횡령한 곗돈과 딸이 맡겨둔 돈을 포함해 성진의 명의로 된 거액의 통장을 서울로 향하는 성진에게 건넨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내일 죽더라도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성진은 눈먼 돈을 가지고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을 떠날 수 있을까? 다른 양상이지만 아버지 세대를 건너뛰고 성진은 할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불은 애먼 곳에서 피어올랐다. 그 불은 모든 것을 앗아가진 않았다. 유령 같은 디지털 이미지가 아닌 실재하는 사진으로 고모네 부부가 성진에게 돌아온다. 고모부에 대한 죄책감과 돈의 출처. 성진에게 잔인한 선택만이 남는다.
집이 아닌 무덤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성진은 사실상 대를 이을 수 없는 경제적 조건하에 놓인 청년이다. 생존이 최우선인 각자도생의 시대에 할아버지의 생존 본능은 동시대에 공명하는 감각일지 모른다. 자신만의 생존을 넘어 가족을 꾸릴 수 있는, 대를 이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성진의 눈앞에 놓였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두 장면은 판타지처럼 보인다. 감독의 단편 <성인식> (2018)의 엔딩과는 반대 상황이다. 돈줄을 끊어버린 엄마를 바라보며 남겨진 독립이 불가능한 자식에게 도착한 것은 119구급차다. 구급대원을 보며 백설(공민정)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연신 말한다. 영화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감(return)과 죽음(death)이란 이중의 의미를 유희적으로 사용하며 현실적인 풍경에 환상을 섞는다. <장손> 역시 이 두개의 의미 사이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달리는 택시 안의 성진의 얼굴과 할아버지의 마지막 발걸음. 이 두개 숏이 빚어내는 봄이란 어떤 모습일까? 봄은 이 영화에 도래하지 않은 미래다. 이 두개의 숏 안에 3개의 시간대가 교차한다. 성진은 돈을 들고 미래로 향한다. 할아버지는 집이 아닌 무덤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카메라는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할아버지를 주시한다. 그는 죽음을 향해 과거로 향하는 중이다. 멀어지는 두 남자 사이에 현재에 해당하는 두부 공장이 있다. 남은 가족들은 새벽부터 자신의 몸을 갈아서 김씨 가문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그렇게 <장손>의 봄은, 잔인한 세대교체는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