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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작은 빛 아래, ‘사람임을 잊지 않고서’

삼촌 시언(권해효)과 학교 건물에서 나오던 전임(김민희)은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전임이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안다. 영화 도입부에서 전임은 시언에게 촌극 연출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들려준다. 원래 연출을 맡았던 이가 함께 연습하던 학생 일곱명 중 세명을 따로 만났고, 그 사실을 접한 세명이 그만뒀으며, 공연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지만 남은 학생들이라도 새로운 촌극에 출연시키고자 시언을 불렀다는 것이다. 전임과 시언은 이 이야기를 조금은 조심스럽게, 별 어처구니없는 일도 다 있다는 듯 가볍게 나누고서 여기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밤 장면에서 영화는 이 사연을 깊은 감정으로 다시 일깨운다. 시언, 교수 은열(조윤희)과 술자리를 가진 후 전임은 혼자 학교로 돌아와 건물 바깥에 담요를 깔고 조그마한 램프를 켜는데,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서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한다. 그의 부름에 여학생 세명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고 이제 네 사람이 램프를 중심으로 둘러앉는다. 이들은 앞서 전임이 시언에게 언급했던, 연출자의 행각 때문에 연극을 관둔 학생들이다. 전임이 이들을 더 가까이 모이게 한 후 묻는다. “마음이 편해졌어?” 학생들은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전임이 학생들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편해져라, 편해져라.” 마치 그 주문이 불러온 듯 이어지는 밤하늘 장면에는 꿈처럼 그믐달이 떠 있다.

어둠 속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한 채, 네 여자가 옹기종기 붙어 앉아 있다. 이 장면은 어쩐지 슬프다. 동시에 강하다. 그것은 옅은 빛을 겨우 붙잡고 깜깜한 세상을 버티는 연약한 존재들의 얼굴이지만, 그 암흑에 쉽게 잠식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다정한 유대감의 강력한 초상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조명 장치를 쓰지 않고 어둠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면서도 그 심연에서 빛의 감각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가 이 순간을 빚어낸다. 이처럼 소박한 방식으로 이토록 절실한 이미지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앞선 전임의 말에서 소문 혹은 소동의 주인공들처럼 흘려 지나간 익명의 상처 입은 학생들은 이 장면이 최선을 다해 밝힌 아주 희미한 빛 안에서 온전하게 사랑받는다. 그러니 이 장면을 먼저 경험한 우리로서는, 지금 전임을 불쑥 찾아온 낯선 남자를, 그의 말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역시나 그는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다고 억울해하며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화를 내며 반문하기도 한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잘못입니까? 그런 일로 공적인 일을 중단하게 해도 되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러는 건데요?” 화창한 가을빛에 드러난 그의 수치심 없는 얼굴과 목소리는 앞서 네 여자의 초상이 이룬 정직함을 모욕하는 것 같다. 전임은 그 초상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그냥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였어요. 같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여준원씨 본인이.” 김민희는 단 일초도 놓치지 않고 준원(하성국)의 변명, 호소, 분노에 모든 촉을 세워 눈빛, 표정, 제스처, 음성의 결로 변화를 일으켜 반응함으로써 이 남자를 향한 전임의 짜증과 경멸, 얼마간의 두려움과 천연덕스러움을 표현한다. 준원에게는 도무지 호감이 생기지 않지만, 그의 그런 면모를 전임이 되받아치는 이 장면의 흔들림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전임은 세 학생을 화면 안으로 따뜻하게 불러들이던 손짓을 여기서는 고집불통의 남자를 화면 밖으로 냉정하게 쫓아내는 데 사용한다. 전임의 명령대로 그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네 여자가 옹기종기 모인 이전 장면의 아름다움과 양립할 수 없는 준원의 추한 모습, 그리고 이를 묘하게 희화화하며 부각하는 김민희의 눈부신 연기에 의해 우리는 망설임 없이 판단하고 정리한다. 이 남자는 악당이다. 그는 여학생들을 농락하고, 학과에 큰 피해를 주고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는 뻔뻔한 바람둥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런 남성상이 크게 낯설지는 않지만, 중요한 차이는 그가 그저 여자에게 구애하는 남자의형상이 아니라 학과에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온 일종의 ‘사건’으로 다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생들을 다치게 하는 위험한 사태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확신 앞에서 문득 걸리는 지점이 있다. 시언과 함께 건물을 나서던 전임이 준원을 발견하고 화면을 나간 뒤, 그 장면은 어떻게 끝났던가? 우리는 시언이 화면을 떠나지 않고 준원과 전임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계단에 앉는 모습을 보았다. 준원과 전임이 대화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관객 중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시언도 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안될 것 같다. 시언은 누구인가. 전임과 은열이 시언에게 하는 말에 귀 기울이자면, 그는 훌륭한 배우이자 연출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사회에서 억울하게 매장되어 오랜 시간 심적으로 고통을 받고, 지금은 강릉에서 조용히 서점을 운영하는 ‘과거’의 예술가다. 그 역시 그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틈날 때마다 토로한다. 누구의 입을 통해서도 구체적인 사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그를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몇년째 일을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영화 후반, 그가 누나와 절연한 계기가 “너 빨갱이니?”라는 말이었다고 전임에게 밝히며 흥분을 참지 못하는 대목에서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와 관련해 그가 겪은 일들의 세부가 아니라 외부의 시선이 한 예술가를, 혹은 그의 세계를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시언은 그 폭력적인 시선의 희생자다. 그러니까 그런 이력의 소유자가 준원과 전임의 모습을 관람하는 중이다. 시언이 자신이 본 것을 따로 언급하는 장면은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금하다. 그는 이들의 장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렇게 잊힌 준원의 장면이 느닷없이 다시 영화에 침입하는 건 중반을 지나서다. 시언이 전임의 작업실에 처음 방문해서 작품을 구경하고 작품론을 들을 때, 앞서 ‘옹기종기 초상’을 이루던 두 학생이 작업실에 다급히 들어온다. 준원이 찾아와 나머지 학생과 나갔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전임과 시언, 그리고 두 학생이 교정을 헤매다가 남녀의 실루엣을 멀리서 발견한다. 다음 장면에서 준원과 여학생은 나무 한 그루 아래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이 장면의 어둠과 침묵은 딱히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 화면에 전임, 시언, 두 학생이 들어선다.

앞선 밤 장면에서 전임과 학생들을 비추던 작은 램프 같은 것은 여기 없다.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색한 상황을 반영하듯 네 여자와 두 남자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그 절묘한 구도와 거기 일어난 움직임이 이 장면의 어둠에서 중층적인 ‘이야기’를 길어낸다. 이들 사이에 우두커니 놓인 나무의 자태 또한 그 ‘이야기’의 일부를 이룬다. 시언은 마치 숨어서 몰래 엿보는 것 같은 형상으로 나무 오른편에 홀로 서 있고 여자들과 함께 왼편에 있던 준원은 이틀 안에 연락을 달라는 말을 던지고 시언쪽으로 이동해 당혹스러운 순간에서 얼른 퇴장하려고 한다. 그런 준원을 시언이 붙잡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하더니, 둘은 이내 화면을 빠져나간다. 여학생은 준원이 청혼했고, 더러 진심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며, 자신이 이틀의 여지를 달라고 했다고 고백한다. 친구들은 어이없어하고, 전임은 비아냥이 살짝 묻어나는 말투로 말한다. “네가 쟤를 좋아했었구나.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다, 그지?” 그때 여학생이 내뱉는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좋아할 수도 있죠.” 이어지는 밤하늘 장면에서 달은 아까보다 커져 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이 장면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 학교에서 쫓겨난 남자가 기어이 돌아와 이번에는 세 학생 중 한명을 골라 심지어 청혼한다. 그는 더 뻔뻔해졌다. 그런데 그런 요약에 담기지 않는, 혹은 반발하는 미묘한 뉘앙스와 생략 또한 이 장면에 모호하게 진동한다. 세 번째 학생의 머뭇거림은 무엇을 뜻할까. 준원을, 사랑을, 바람둥이를 규정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그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시언은 준원을 데리고 나가 어떤 말을 나누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두 남자의 대화 내용은 모르지만, 나중에 시언이 공연을 마친 후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40년 전, 이 학교에 와서 촌극을 연출했고 서양화를 전공하는 첫사랑을 만났지만 큰 상처를 줬다는 기억 말이다. 출입 “통제가 심한” 여자대학교에 얼룩처럼 나타난 시언과 준원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네 여자의 ‘옹기종기 초상’과 준원이 전임을 찾아온 장면을 가르던 도덕적 경계선은 어둠 속, 여섯 사람의 시선이 불분명하게 오고 가는 이 대목에서 어느덧 희미해진다. 이 대목은 우리를 불투명한 지대로 불러들여 준원과 전임의 장면 앞에서 우리가 느낀 선명한 인상들을 새삼 다소 복잡한 심경을 안고 쳐다보게 만든다. 우리는 제대로 보고 느꼈던 것일까. 의심하지 않고 즐긴 그 선명함이 뒤늦게 이 장면에서 흐릿하게 여러 길로 갈라지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수유천>은 한줌의 빛만 있다면 다른 구도, 다른 각도에서 존재는 다른 리듬으로 달리 보인다는 진실을 여타의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 화면 안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만으로도 설득해낸다. 이 영화의 태도는 과감하고 정신은 검소하고 시선은 성숙하다.

전임에게 연극을 그만둔 마음 아픈 학생들이 있다면, 열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 대본으로 촌극을 꾸리려 하는 대견한 학생들도 있다. 그간 홍상수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연극적’ 설계가 시언의 촌극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전쟁터에서 들릴 듯한 굉음이 무대에 내리치고 빛과 어둠은 과하게 대비되며, 무엇보다 인물들은 극적인 상황에 놓인다. 그들은 아직 종결되지 않은 사건 한가운데서, 혹은 사건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들처럼 보인다. 무대 불이 켜지자, 네 여자가 앉은뱅이 상에 둘러앉아 남은 식량과 물에 대해 언급하고, 불현듯 아빠와 오빠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그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추장, 스팸, 라면을 연신 맛있다며 먹는 모습은 홍상수의 여느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며 ‘연극적’ 설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무대가 다시 어두워지면 분위기는 돌변해 사건의 비극성을 전시한다. 그들 위로 그물인지 철창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귀를 찢는 사운드가 이들을 덮친다. 이들은 죽음의 시간을 부유하는 유령들인가. 홍상수의 세계가 경계하는 설정들이 촌극에 압축되어 압도적인 물질들로 시청각화된다. 이 촌극 속 네 여자의 초상은 전임과 세 학생이 한밤 야외에서 더없이 자연적 상태로 되찾은 평온과 조화의 풍경을 완전히 인공적으로 변주해서 뾰족한 시선으로 다시 응시하게 만든다.

이 암울한 촌극은 환대받지 못한다. 전임은 총장 반응이 좋지 않다고 전하며 “연극이 정치적이라고 오해한 것 같아요. 아니면, 젠더의식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여대니까”라는 알쏭달쏭한 설명을 덧붙인다. 전임은 촌극에 대해 비평하지 않고, 학생들도 직접 연기한 이들로서의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총장이 은열과 전임을 불러 촌극이나 시언에 대해 묻는 장면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촌극의 내용도, 이에 대한 평도 아니라 그 촌극을 경험한 이들이 도달한 하나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시언은 즉흥시처럼,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돌아가면서 말해보자고 제안한다. 홍상수의 카메라가 취기 오른 학생들의 얼굴 각각에 다가간다. 그는 배우들 사이에서 과하게 휘몰아치는 파토스를 제어하지 않고, 그 투명한 감정의 밀도로 이 장면을 채우기로 결심한 것 같다.

이들은 울음을 참지 못하며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명확한 모델이 아니라 가능태로 말한다. 이를테면 “저 같은 사람이 아닌 사람.” 그러나 그 말은 어떤 그럴듯한 정의보다 간절하고 구체적이다. “구석에서 작은 불이라도 켜고 죽을 때까지 지킬 겁니다. 저도 사람임을 잊지 않고서.” ‘사람’임을 잊지 않는 사람. 동어반복적인 이 말은 규정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 다짐은 영원히 질문으로만 살아남으므로 실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작은 빛 하나에 기대어 사건과 재난의 시간을 버텨내던 여자들의 광경으로 홍상수는 내내 그 다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촌극이 끝나고 학생들이 눈물을 쏟아낸 그 밤, 마침내 보름달이 뜬다.

그믐달에서 보름달에 이르렀다. 공연 연습에 주어진 열흘이 지났다. <수유천>은 그 어느 때보다 한정된 시간을 상기하고 시간의 흐름을 제시한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 우리가 마주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며 걸어오는 전임을 불현듯 정지시킨 화면이다. 이 결말의 천진한 표정은 아름답지만 당혹스럽다. 실물을 보고 기억하면 무엇도 의심하지 않고 두렵지 않다고 말하던 전임이다. 그가 확신하던 실물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지나간 장면들로 돌아가 새롭게 씻은 눈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수유천>은 전임이 만든 강물 연작의 흐름처럼 시간과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으로 세계의 다른 얼굴을 거듭 깨워 다시 보고 또 보려 한다. 이 영화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 힘을 믿고 꺼뜨리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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