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는 허구를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이는 동명의 소설을 원형으로 삼고 있는 <딸에 대하여>에 대해 우리가 흔히 품을 수 있는 기대이자 의심이다. 대중으로부터 이미 응답받은 서사 위에 세워졌다는 친숙함과 안도감, 그리고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면 할수록 점점 더 크게 드리워지는 원작의 그림자. <딸에 대하여>는 이러한 경계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여기에 영화의 인물들이 속한 상황은 찬반으로 극명하게 양분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동시대의 담론들과 연결된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엄마 혹은 여사님으로 불리는 주희(오민애)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그녀의 딸 그린(임세미)과 그의 동성 파트너 레인(하윤경)은 LGBT 이슈를, 주희가 요양원에서 극진히 간병하는 제희(허진)는 본래의 다정한 뜻과는 달리 이제는 정책 앞에 붙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 돌봄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물리적 현실을 구현할 수 있다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믿음에 따르면,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바깥에서부터 밀려들어오는 관객의 활발한 반응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딸에 대하여>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각색한 <82년생 김지영>의 사례에서 떠올릴 수 있듯 애꿎은 공분이 영화보다 선행하게 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반가운 지점은 <딸에 대하여>가 견지하고 있는 태도이다. 그 태도란, 영화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소설이라는 영화의 근원적 태생도, 첨예한 의견들이 혼재하는 영화의 바깥도 아닌 프레임 안이라고 믿는 단단한 의지다. 오로지 프레임 안에서 재현되는 이미지만이 이 영화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은 자신감과 이를 뒷받침하는 고민의 흔적들은 <딸에 대하여>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밝힌다. 주지하다시피 소설 <딸에 대하여>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김혜진 작가가 고백하였듯 소설 속 ‘나’는 설사 그 대상이 내가 낳은 딸일지라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의 불가해함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이해의 영역으로 자신의 딸을 옮겨보려 애를 쓴다. 소설은 주인공이 겪는 지난한 내면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영화는 한 중년 여성의 멈추지 않는 고뇌의 언어들을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소거한다. 시위 현장에서의 폭력적인 충돌, 감정이 요동치는 대화들,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내적 독백 등 영화가 함의하는 것에 대해 자칫 성급한 판단을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을 영화 안에 최소한으로 들이거나 이미지로 재현하더라도 감화의 문턱 앞에서 멈춘다. 이렇듯 영화는 부재해도 무방한 것들을 애써 재현하지 않고 부재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자신에게 지워진 예측 가능한 오해들로부터 멀어진다. 이때의 오해란,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방관자로 그려지는 남성들, 오작동하는 사회의 시스템 등의 빈자리를 서사의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겨냥하여 대중의 날 선 반응을 재빠르게 이끌어내려 하는 포퓰리즘적 영화가 아니냐는 의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골몰하는 지점은 거시적인 담론의 생성이 아닌, 소설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는’ 한 여성의 하루를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딸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영화 안에 함께 머물러보자고 호소한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법
과도한 상징이나 수사법이 부재하는 이 영화가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은 숏과 숏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과 그로부터 생성되는 리듬감에서 찾을 수 있다. 주희와 제희, 그리고 동성 커플 그린과 레인은 공교롭게도 모두 세계와 불화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에게 허락된 삶의 터전이란 병든 신체처럼 으스러지기 시작한 것 같은 낡은 집,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병실 한칸, 몸을 던져 투쟁하며 지켜내야 하거나 대출이 나오지 않는, 내일을 보장해주지 않는 직장이다.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이들에게 내일이란 너무나 아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들은 시간의 유한함을 자각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멈추지 않고 말을 건넨다. 요양보호사인 주희는 정신을 잃어가는 제희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제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레인 역시 주희에게 멈추지 않고 말을 걸어보지만,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대화를 거부하거나 차갑게 반응한다. 카메라는 한 공간에 있는 인물들을 숏과 역숏(혹은 오버더숄더숏)으로 분리하며 둘 사이를 오가지만 이들의 대화는 대체로 실패하고 만다. 이들이 행하는 것은 대화라기보다 언제 올지 모르는 회신을 기다리며 무작정 보내는 교신에 가깝다. 접속에 실패하고 마는 숏간의 교신은 허공에 켜켜이 쌓이며 무거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실패한 교신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결국은 상대에게 가닿는다. 주희는 동료 강사의 부당한 해임에 맞서는 딸 그린에게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일에 나서느냐고 비난한다. 그런 그녀에게 그린은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며 맞선다. 얼마 후, 제희를 대신해 요양원에 항변하는 주희는 자신이 딸에게 뱉었던 말, 가족도 아닌 남의 일에 왜 이렇게까지 나서냐는 말을 동료에게서 똑같이 되돌려 받는다. 그러자 그녀는 그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하듯 동료에게 들려준다. ‘이건 단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은 메아리치듯 입에서 입으로, 숏에서 숏으로 전이되고, 이 순간 소통에 실패하며 서로 불화하던 존재들은 성글게나마 접속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국의 아이들을 거두어 먹이고 가르치는 데 젊음을 헌신했던 제희 역시 아마도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족도 아닌 타인의 일에 두팔을 걷어붙이는, ‘왜 남의 일에’로 시작하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는 인물들은 느슨한 연대를 형성한다.
편집을 통해 타인을 연결하는 이러한 방식은 소설을 영화화한 성공적 사례 중 하나인 <디 아워스>가 구사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디 아워스>가 다른 시공간에 사는 세명의 여성,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소설에 탐닉한 로라(줄리앤 무어),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클라리사(메릴 스트리프)를 마치 주물로 뜬 듯이 행동과 말을 적확하게 이어받는 교차편집으로 엮어냈다면, <딸에 대하여>의 숏 사이 간격에는 느리면서 긴 호흡이 있다. 영화는 마치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듯 천천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또 다른 방식은 삶이 결국 죽음이라는 불변의 종착지를 향해 흘러갈지라도, 오늘 하루라는 좁은 경유지에 잠시 멈춰 서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장례식장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죽음과 등을 맞대고 있는 삶에서의 하루란 시작이 아닌 소멸에 가까운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설정을 바꾸어, 길 위를 걷는 주희를 비추는 것으로 이야기를 열고 닫는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의 연속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 애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 꺼져가는 생명, 어쩌면 자신의 미래일지도 모르는 제희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배웅하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린과 레인이 겪는 불투명한 시간들도 애써 마중해보려 한다. 그렇게 자신의 하루를 타인을 돌보는 시간들로 쪼개어 분인(分人)으로 살아낸 그녀는 홀로 잠에 들고, 다음날이면 다시 걸어가며 무명의 하루를 살아낸다. 자신의 딸에 대하여 한뼘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계속되는 삶에 대한 배웅과 마중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이 영화의 빛나는 지점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소설과 적당한 간격을 둔 평행선의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제희의 죽음이 다가오자 재현하기를 멈추고 궤도에서 이탈하여 원작에 없는 장면을 삽입한다. 네명의 여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프레임 안에 들어와 빵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향해 웃는 시퀀스다. 이때 인물들이 마주 앉아 바라보는 것이란 불가해한 타인이 아니라 서로의 미래이자 과거에 가까운 것이다. 꿈 혹은 상상으로 여겨지는 이 이상적인 시퀀스는 제희의 죽음 앞에 배치되어 예정된 무연고자의 죽음을 한발 앞서 애도하고, 죽음의 순간을 우회하여 보여줌으로써 작별의 순간을 잠시나마 유예한다. 명확한 주인이 없는 이 시퀀스는 네명의 여성이 마땅히 가질 수 있는 장면인 동시에, 이미랑 감독의 목소리이자, 이들의 삶을 응원해보기로 결심한 관객의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프레임 안으로 관객이 동참하도록, 함께 꿈꿔보도록 이끈다. 이 시퀀스를 기점으로 영화는 두개의 결말로 분화된다. 첫 번째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 영화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잇따르는 다른 하나의 결말은, 제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소설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결말의 편에 서든 영화가 향하는 도착지는 같다. 역시나 영화에만 존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희는 제희가 아닌 다른 노인을 부축하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젊은 여성 커플을 본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이 장면은 영화가 소설에서 잠시 빠져나와 상상해보려 했던 첫 번째 결말과 같은 형질의 이미지다. 계속되는 삶에 대한 배웅과 마중, 나와 타인의 하루에 대한 긍정이 있다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바로 영화 <딸에 대하여>가 도착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