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분주하고 산만하게 걷는다. 손에 꼬챙이 음식을 든 채 노래를 흥얼거리고, 갑자기 욕을 하며 발차기를 하고, 서로 모른 척 걷다가 갑자기 우르르 대형을 만들어 목청껏 언쟁하기도 한다. 그들의 보행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어른은 길을 걷다 종종 그들의 대형 안에 포획된다. 굳은 얼굴로 바쁜 척 걷다 성가신 꼬맹이들에게 둘러싸인 어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우습게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어른들은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에 힘과 속도를 붙인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시 점처럼 넓게 흩어져 대수롭지 않게 어른을 포위한다. 뛰지 않는 한 그들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뛸까? 말까? 망설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른의 보법은 아이들의 호쾌한 대형 안에서 점점 더 우스워져만 간다.
아이들은 규칙도 없이 삐뚤게 걷고 나는 일정한 호흡으로 바르게 걷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연하고 나는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모르는 아이들과 걸을 때 나는 미친다. 어쩌다 나는 똑바로 걷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게 되었을까? 이제 와 다시 비틀거리며 걷는다 해도 그것은 광대의 걸음처럼 우스운 연기에 불과하겠지. 그런데 잠깐. 나는 왜 우스워지면 안되는 거지? 나는 대체 무엇을 보면서 우습다고 생각하길래? “이 미친놈아!” 생각이 헝클어지고 있는데 한 어린 남자아이의 외침이 골목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지금 내가 저 아이를 바라본다면 나는 정말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 고개를 돌려서는 안돼!’ 그러나 살면서 ‘미친놈’이란 호명에 뜨끔하지 않은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나는 결국 또 ‘미친놈 부르셨나요?’ 하며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본다. 장난감 자판기 앞에서 친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 아이를.
무엇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을까? 탓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오늘은 2000년대 후반 K팝에 퍼진 ‘후크송’을 원인으로 꼽겠다. 원더걸스의 <Tell Me>,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 소녀시대의 <Gee>, 카라의 <미스터>, 티아라의 , 유키스의 <만만하니>,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어쩌다>까지. 반복되고 강조되는 소리는 강아지는 물론 사람도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종종 불안은 중독을 불러일으킨다. ‘후크송’의 독성은 음악이라는 (합법적인) 마약들 중 가장 강력했다. 따라서 ‘K팝 2세대’의 경쟁이 본격화된 당시의 가요 산업에서 타이틀곡을 ‘후크송’으로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전략이나 다름없었다. TV에서, 휴대폰에서, 길거리에서 사람을 세뇌시키는 듯한 멜로디가 매일같이 흘렀다. 단순한 리듬과 반복되는 가사는 중독성은 물론 최면까지 유발했다. 요즘 노래가 유치하다며 불평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노래에 맞춰 손바닥을 비비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치 ‘후크송’의 광기에 사로잡힌 마리오네트처럼….
손담비의 <미쳤어>는 그 광기의 정점에 있는 곡이었다. 2008년, 사람들은 의자에 거꾸로 앉아 머리를 빙빙 돌리고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내가 미쳤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용감한 형제가 엄정화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이 곡은 이효리와 아이비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손담비에게 주어졌다. 디바의 계보를 훑고 세상에 나온 탓일까? <미쳤어>는 무명이었던 손담비를 단번에 슈퍼스타로 만들며, ‘히트곡만 어림잡아 100곡’이라는 2008년 가요계에서 결코 빼놓고 말할 수 없는 ‘메가 히트송’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애처롭게 따라 불렀지만 무대 위 손담비의 모습은 전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미쳤다’라는 자조와 고백의 노래를 왜 저렇게 건강한 기운으로 부르는 거지? 마치 내가 미치긴 미쳤는데 5분 안에 극복하겠다는 선포처럼…. 당시 손담비에게 자주 붙던 ‘고양이상 미인’이라는 기사의 타이틀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를 떠떠떠떠떠 떠나 버버버버버 버려’처럼 진동하는 가사도, 다소 앙증맞게 관절을 움직여야 하는 안무도 그냥 시원하게 해내는 손담비의 모습은 나른한 고양이보다 퓨마나 표범에 비교되는 것이 더 적합했다.
손담비의 광기는 가짜 광기야. 저 사람은 미쳤다는 한마디로 자신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짤 속에서도 손담비의 ‘니가?’라는 눈빛은 누군가를 가소롭게 여길 때나 사용되지 않던가? 그래서 <미쳤어>는 직설적인 제목과 가사에도 불구하고 나의 미쳐버린 상태를 표현하기엔 한없이 부족한 노래라고 여겼다. 하지만 음악은 종종 원곡자의 손을 떠나 새로운 의미를 갖추기도 한다.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K>처럼 기성곡을 부르는 음악 경연 예능의 인기도, 과거의 명곡들을 리메이크로 소환하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의 흥행 속에도 바로 그런 기능이 작동했을 것이다. 물론 “원곡자를 이길 수 있는 리메이크는 없다”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가끔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곡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재탄생하기에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김바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르는 <사랑했지만>(김광석), 달콤한 세레나데 같은 박재범의 <소주 한 잔>(임창정), 음산한 기운이 응축된 선우정아의 <Next Level>(에스파), 연극 대 위 독백 같았던 박정자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최백호) 등의 무대를 보라. 원곡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사운드가 곡의 감상을 완전히 새롭게 만든다.
손담비의 <미쳤어>는 발매 후 10년이 지난 2019년 <전국노래자랑> 종로구 편에서 지병수씨의 무대를 통해 다시 태어난 곡이다. 등을 돌리고 선 채 하늘에 손가락 하나를 뻗은 70대 후반의 남성은 자신만의 그루브로 몸을 움직이며 무대를 시작한다. ‘내가 미~이쳤어, 정말 미이~쳤어’, ‘떠.떠.떠.떠 떠나, 버.버.버.버 버려’ 같은 방식으로 곡을 멋대로 늘였다 줄였다 부르는 그는 마치 리듬의 마법사처럼 보인다. 손으로 자신의 옆태를 따라 훑거나, 군데군데 귀엽게 손목을 꺾어 추는 춤, 윙크와 경례 같은 액션들은 너무도 적절해서 그가 이 곡을 얼마나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고, 일렉 사운드가 가득 찬 원곡을 느리게 편곡해 ‘뽕짝’의 느낌을 가미한 밴드 세션은 그의 간드러지는 가창과 여린 춤 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웃다가 눈물 흘리는 관객들도 보였지만, 그들 또한 ‘할담비’가 장악한 무대에서 결코 눈을 떼지 못했다. 완전한 자신의 페이스대로 춤추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결코 우습게만은 여길 수 없는 신성한 광기처럼 보였다.
종종 공원이나 산책로 입구엔 ‘걷기의 바른 자세’가 그려져 있다. 고개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젖꼭지를 앞으로 발사할 것처럼 서 있는 일러스트를 나는 완벽하게 따라 하려 애쓴다. 하지만 트랙이 깔린 공원이 아닌,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걸을 땐 그런 의식적인 자세 잡기가 소용이 없다. 그럴 땐 땅의 형태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내 몸속에 내재된 호흡과 리듬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길의 난이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정상 보행에 집착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정상적으로 걷는지를 집요하게 관찰하도록 한다. 우리는 각자의 보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기준을 한없이 좁히는 데에만 시간을 사용한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하는 걱정을 내려놓고 내면의 리듬을 따라 비틀대며 걸어보자. 나로 인해 ‘미친 사람’의 범위가 점점 확장된다면 갈지자로 걷고, 거꾸로 걷고, 세발로 걷고, 바퀴로 구르는 이상한 걸음들이 길을 함께 넓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