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걸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달았다. 일요일 아침마다 숙제처럼 찾아오는 중요한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볼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늦잠을 잘 것이냐를 두고 매번 흔들렸다. 사실 뭘 골라도 상관없었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선택한 날은 “이번주는 별로네, 잠이나 더 잘걸”이라며 후회했고 늦잠을 택한 날은 놓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시무룩해지는, 예정된 아쉬움의 반복이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던 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느 쪽을 골라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먼저 떠오르는 ‘후회형 인간’인 나는 지나온 길을 곱씹고 되돌아보는 습관을 기본값으로 장착했다.
간혹 왜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언해주는 이들도 있다(특히 명절 때만 보는 먼 친척들). 솔직히 고백하자면 걱정해주시는 것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다. 스무살 무렵에는 질척이고 방해되던 것들이 마흔이 넘고 나니 기어이 쓸모를 찾아내 장점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건 반대로 쉽게 흘리고 잃어버린 것들을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지나간 것, 이미 과거가 되어 저 구석에 밀어둔 것들이 새삼 어여뻐 보인다.
(경험상) 후회는 구체적일수록 도움이 된다. 다만 내내 후회만 하는 것도 곤란하니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시기를 정해놓고 대청소하듯 정기적으로 해보려 애쓰는 중이다. 주로 연말, 연초, 그리고 설날, 추석 같은 명절이 딱 ‘후회하기 좋은 날’인데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만큼 시야가 열리는 탓이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고 한다. 말과 글 속에 파묻혀 사는 게 일이라 종종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단어를 통해 의미가 더 선명해질 때가 있다.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레트로와 빈티지, 앤티크는 엄연히 다르다. 레트로가 몇십년 단위로 지나간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거라면, 빈티지는 특정 시대의 유효한 가치를 품은 물건이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가는 쪽에 가깝다. 100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앤티크의 경우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한 반면 레트로는 시대에 맞춰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행위, 다시 말해 ‘지금 어떻게’ 즐기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요즘도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무한도전> 쇼츠를 찾아보면서 멍 때리는 ‘나’와 쇼츠를 통해 예능 <무한도전>을 처음 접한 젊은 세대들은 같은 걸 보면서도 사실상 다른 체험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 축에서 각자의 우주를 산다. 항상 그랬듯 <씨네21>은 타인의 우주가 궁금하다. 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에 독자 여러분께 레트로 특집을 선물한다. 돌이켜보니 ‘나의 후회’는 빈티지와 앤티크처럼 시간과 함께 익어가는 과거를 닮아 있는 것 같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볼까 말까 고민하던 내가 진정 아쉬웠던 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리라. 오랜만에 <디즈니 만화동산> 에피소드를 찾아보며 이제는 희미해져 기억에서도 사라진 소년 시절의 나를 새삼 그려본다. 예정된 아쉬움과 함께 오늘이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