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 단요, 서이제, 이희영, 서윤빈, 장강명, 위래, 심완선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의 SF 앤솔러지 시리즈 세 번째 책은 ‘빛’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 시리즈를 여는 글은 소설가 문지혁이, 닫는 글은 SF 평론가 심완선이 꾸준히 맡고 있는데, 이 두편의 논픽션을 포함해 앤솔러지가 완성되는 구성이다(두 사람의 글은 본문에 수록된 소설의 해설인 동시에 주제어에 대한 독립적인 글이다).
단요의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는 31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는 음침하고 평화로웠으며, 미래를 상상하긴 어려울지라도 절망할 이유 또한 마땅치 않았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낙관 아닌 낙관으로 지탱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의미에서. ‘나’는 송전망을 관리하는 기술직 사무관이다. 어느 날 종교역사학 연구자인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빛이란 뭘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마지막 남극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냉동된 원시인이 발견된 일로부터 시작한다. “어쩌면 3천년 전의 지구에는 장파장 적외선을, 온도를 보는 인간이 여럿 있었을지도 몰라.” 걸어다니는 열화상카메라와도 같은 인간 말이다. 이러한 발견은 성경에서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역사를 다시 해석하게 만든다. 기적이 없는 시대, 기술과 과학을 섬기는 시대에 빛과 구원은 어떤 함의를 갖게 될까. 서이제의 <굴절과 반사>는 해저 도시에서 살아가는 미래 인류의 모습을 그린다. ‘나’는 5년 전 해저 터널 붕괴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서 해저에서의 삶이 보장하는 안전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을 떠올리기 어려워한다. 그런 ‘나’에게 어떤 기회가 찾아오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빛을 보는 모험이 시작된다. 이희영의 <시계탑>은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가 제때 빛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험하는 기이한 사건을 그린다. 서윤빈의 <라블레 윤의 마지막 영화에 대한 소고>는 일종의 파운드 푸티지 형식으로, 인터넷에서 발견된 문서라는 각주가 달려 있으며, 장강명의 <누구에게나 신속한 정의>는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기사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인공지능 법률 서비스 기업의 역사를 기술해나간다. 위래의 <춘우삭래>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가 보내온 신호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상황에 도달하는지를 차례로 그려내는데, 부제를 붙인다면 ‘등대를 찾는 모험’ 정도가 될 것이며, 해로움만 있으며 이득은 없는 상황을 뜻하는 ‘춘우삭래’라는 스포일러성 짙은 제목이 과연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지를 흥미진진하게 따라가게 한다. 한 작가의 단편집이 아니라 앤솔러지인데도 수록 순서를 지켜 읽을 때 재미가 배가된다. ‘빛’이 인간의 삶만큼이나 SF라는 장르에서 얼마나 다양한 함의를 갖고 해석되고 사건의 중심에 존재할 수 있는지 흥미롭게 보여준다.
우리가 빛을 대하는 태도는 학문이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과정과 관련이 있다. 빛을 분석하고 실험한 과학자들은 태양광이나 별빛을 신의 은총이 아니라 자연현상으로 뒤바꿨다. - 심완선, <크리티크-그 길의 악몽, 그 얼굴의 빛>, 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