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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종말 앞에서 서성거리는 이들 - <늦더위> <미지수> <다섯 번째 방>이 찍은 자연물의 의미
이우빈 2024-07-12

*<늦더위> <미지수> <다섯 번째 방>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미지수>

지난 3~4월쯤 반려돌(돌멩이의 ‘돌’이다)을 키우는 사람들이 뉴스에 소개된 적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한국 청년들 사이에선 반려돌 문화가 유행 중이라 보도하면서 국내 뉴스들도 덩달아 이 사태를 주목한 것인데, 몇몇 연예인의 사례가 과대 포장되었단 느낌도 없지 않긴 하다. 여하간 청년들이 반려돌을 키우는 이유로는 한국 경제활동층의 과한 노동시간, 개인주의 만연으로 인한 사회적 관계 맺음의 피로감 등이 따라붙곤 했다. 사람은커녕 동물과 보내는 시간조차 즐길 여유가 없으니 얌전한 돌과 교감하겠다는, 대한민국 고유의 흉흉한 청년 담론에서 파생한 이야기였다.

반려돌 관련 뉴스가 등장한 이후 2024년 2분기에 개봉한 일련의 한국 독립영화를 상기하면, 반려돌 이야기의 시대적 함의가 지금 창작자들의 영화적 고심에 보편적으로 녹아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돈구 감독의 <미지수>와 서한솔 감독의 <늦더위> 그리고 전찬영 감독의 <다섯 번째 방>은 작금의 인물들이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겪고 있는 각종 곤란함, 더하여 이미 맺어진 관계들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에 대한 당황스러움까지를 드러낸다. 이 당혹감은 다소 뜬금없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흙이나 풀과 같은 자연물의 이미지다. 영화 속에서 방황하던 카메라가 끝내 사람이 아닌 자연으로 향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란 피부 대신 자연의 푸른 초목을 찾는 카메라의 마음이 반려돌을 원하는 뉴스 속 사람들의 심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늦더위>의 화분

<다섯 번째 방>

<늦더위>엔 무수한 관계의 종말이 그려진다. 8년째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던 주인공 동주(기진우)는 갑작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전 연인, 군대 후임, 우연히 만나 함께 농구한 아이들, 공룡알 유적지의 여행자들, 게스트 하우스의 숙박객, 중학교 동창들, 삼촌 내외, 오래 보지 않은 부모님, 초등학교 선생님 등을 만난다. 그러나 이들과의 관계는 단 하나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채 맥없이 끊겨버리고 만다. 이 관계(들)의 휘발엔 늘 어딘가 석연치 않은 동주의 미지근한 처세와 이 사태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은근한 냉정함이 섞여 있다.

동주는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다. 혹은 그러질 못한다. 동주가 전 여자 친구 지영(정미형)을 만났을 때 동주는 수풀을 등진 채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분명히 동주와 지영이 대화하는 상황이지만 “저기 콩국수 집 없어졌지? 아, 넌 아직도 소금 그렇게 넣냐? 너무 짜 그거”라며 동주는 구태여 독백하듯 뇌까린다. 카메라는 그들의 비정상적 소통에 톤을 맞춰 둘을 완전히 분리된 프레임에 가두고 만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둘을 한 프레임에 잡아주며 관계 회복의 기회를 주지만, 동주는 끝내 지영을 보지 않고 호수만 응시한다. 곧 결혼한다는 지영에게 동주는 모호한 축하의 말과 딴소리를 늘어놓기만 한다. 요컨대 <늦더위>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동주가 용기내지 않는다면, 동주가 자신의 관계를 똑바로 끝맺지 못한다면 영화 역시 동주가 마주하는 관계의 양상들을 명쾌하게 다룰 수 없다. 여행 중에 만난 상대 모두가 동주와의 후일을 기약하지 않고 기화하듯이 홀연히 사라지는 이유다.

관계의 스러짐이 이어진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 사랑의 기류를 탄 중학교 동창과도, 모종의 이유로 연을 끊은 부모님의 집에 찾아갔을 때도 동주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관계를 매끄럽게 종료하지 못한다. 즉 동주의 어려움은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꾸리느냐의 차원에 국한하지 않는다. 살아가며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지난날의 관계들을 어떻게 매듭지을 것인지의 곤란함마저 그의 삶을 계속하여 포박한다. 끝맺기가 무서워서, 그러한 일에 익숙하지 않고 미숙해서 동주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도 함부로 몸을 던지지 못한다. 고성의 공룡알 유적지에서 세명의 남녀는 서로간의 우연한 만남을 즐거운 여행으로 전환하지만, 동주는 어렴풋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대화만 엿듣고 그들이 본 땅의 흔적을 살필 뿐이다.

<늦더위>의 마지막에서 동주는 방 창가에 작은 화분을 새로 놓는다. 창문 바깥의 풀이 마치 화분 위에 자라난 듯 보이지만 아직 화분엔 흙뿐이다. 돌이켜보면 동주는 지난 몇년 동안 플라워 디자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한 전력이 있다. 젊은이가 주인공인 영화의 결말에 흙뿐인 화분이 등장했다면 으레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청춘의 희망이라든지, 매번 남을 위해 식물을 가꾸던 이가 자신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식의 낙관이 느껴질 법하다. <늦더위>도 다소간 그러한 의도를 심어놓은 듯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모호하게 지나친 채 화분 속 토양과의 교감이나 풀이 자라날 것이란 가능성만으로 후일을 기약하는 동주의 마지막은 관계의 희망보단 초연함에, 천착보단 놓아줌에 가깝게 느껴진다.

<미지수>의 녹음

<늦더위>

<미지수> 역시 관계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젊은 남자 우주(반시온)는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그의 연인이었던 지수(권잎새)와 엄마 신애(윤유선), 우주가 일하던 치킨집의 사장 내외 기완(박종환)과 인선(양조아)은 그의 죽음을 감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환상이 절반 섞여 어지러운 현실을 살고 있다. 그들의 어지러움은 영화의 스토리와 플롯, 촬영 전반으로 퍼진다. 영화는 러닝타임의 중후반부까지 우주가 죽었단 사실을 명시하지 않는다. 이에 기행과 몽상으로 점철된 네 인물의 일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파편적 이야기로 교차한다. 지수는 이미 죽은 우주가 자기 집에 찾아왔단 이야기의 설정을 스스로 만들기에 이르고, 지수와 우주는 우주의 친구 영배(안성민)나 신애를 죽여 화장실에 시신을 유기하기도 한다.

지수와 우주가 영배를 화장실에서 처리 중인 때, 거실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360도 패닝하며 집 안을 어지러이 훑기 시작한다. 콘티뉴이티의 아무런 당위가 없는 이 패닝 이미지의 끝에서 카메라는 다시금 화장실을 찍는다. 그러나 다시 본 화장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말 그대로 미지수의 공간 앞에 박힌 카메라는 무수한 죽음이 일어나는 저곳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영화적 상상일지라도 이미 죽은 이들의 생환은 눈앞의 현실로 보장될 수 없다. 우주의 죽음, 혹은 <미지수>를 보며 많은 평자가 말했듯 우리 사회에 일어난 여러 사회적 죽음의 정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혼란이 360도 패닝하는 카메라의 원심력으로 치환되어 갈피 없는 죽음의 애상을 애도하는 것이다.

애도의 끝은 사람이 없는 녹음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마지막, 지수는 우주와의 이별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듯 창문 커튼을 힘차게 열며 바깥을 바라본다. 하지만 결말 이후 이어지는 엔딩크레딧에는 “난 긴 터널을 지나고 있어. 저 멀리 작은 빛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빛의 존재는 알 수 없었어”란 어구와 함께 지수와 우주가 있었던 공간의 풍경들이 나열된다. 사람 없는 방, 인기척이 없는 길가의 나무들, 아파트 화단의 풀숲, 그네가 흔들거리는 산속까지 화면은 상실의 자연적인 흔적으로 가득히 찬다. 죽음으로 인한 관계의 일변은 명백히 종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의 여파에 우리는 매번 당혹스러워하며 이 사실을 천천히 체화하는 과정에 평생 머무를 수밖에 없다.

관계의 절실함을 돌과 풀과 흙에

<미지수>

“난 긴 터널을 지나고 있어. 저 멀리 작은 빛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빛의 존재는 알 수 없었어”란 <미지수>의 읊조림은 <다섯 번째 방> 속 하나의 장면과 부드럽게 공명한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전찬영 감독은 애증의 대상인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짧은 굴다리 안을 주행하고 있다. 굴다리의 끝에는 멋들어진 노을빛이 기다리고 있으나 감독의 가정이 겪을 추후의 과정은 마냥 순탄치가 않다. 아버지와의 오랜 갈등 끝에 어머니는 독립하여 새 보금자리를 만든 듯 보이며, 그 사이의 딸은 누구 하나와의 관계를 무 자르듯 종결하지 못한 채 감정의 서성거림을 화면에 드러내며 영화를 지속한다.

<다섯 번째 방>엔 크게 두 종류의 아슬아슬한 관계가 있다. 하나는 감독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다. 서사의 대개는 아버지가 초래한 가정의 불화를 그리는 데 할애된다. 그렇다면 두개의 관계 항과 서사적 배경을 종합했을 때 필시 아버지의 존재는 영화에서 소거돼야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전술한 짧은 굴다리를 통과한 이후 영화가 찍은 아버지의 후경엔 빛과 풀과 물이 단단히 버티고 있으며, 딸에게 아이처럼 장난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가까운 팔로숏으로 이어진다. 이 화면의 복잡다단한 역동감은 <미지수>의 패닝처럼 한 관계의 종말을 각오해야 한다는 일종의 결기와 가족을 향한 애증의 안타까움이 한데 뒤섞여 만들어낸 움직임으로 보인다. 결국 영화는 명백하고 가학적으로 부모와의 관계를 재단하거나 끝맺지는 못한다. 대신 그저 정물과도 같이 화면을 품어주는 자연의 이미지가 기다리고 있다. 조부모가 가꾼 옥상의 텃밭에 물을 주는 아버지, 새집 근처의 수풀에서 딸과 냉이를 캐며 봄 내음을 만끽하는 어머니, 이들의 심정을 이어주는 풀과 흙의 풍광에 시선을 떨군 채 영화를 조심스레 매듭을 짓는다.

반려돌을 키운다는 일은 타아와의 관계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외려 다른 이와 관계 맺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절실히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각자도생을 조장하는 사회생활의 난관(<늦더위>), 급작스러운 (개인적·사회적) 죽음(<미지수>), 시대 흐름에 따른 가족 개념의 급변(<다섯 번째 방>) 등은 리가 일구어왔던 관계들을 끊어야만 하는 상황을 계속해 조장한다.

이 곤혹 앞에서 <늦더위>의 동주는 사람과 마주하기를 끝내 망설이며 화분에 자신의 앞날을 기대었고, <미지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위해 그가 있던 숲을 찍었으며, <다섯 번째 방>은 아버지와의 관계 종료를 지연하며 무성한 봄의 녹음에 영화의 마지막을 맡겼다. 사람을 직시하지 못하고 관계에 직설하지 못하며 얌전한 자연에 시선을 맡기는 방식은 어쩌면 무책임할 수도, 끝내 해내야만 하는 일을 지연하기만 하는 늦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함부로 마치지 못할 관계의 종말 앞에서 솔직하게 서성거리고 당황하면서, 한편으론 이 바스러진 관계의 회복을 내심 바라면서, 가만히 있는 돌과 풀과 흙에 관계 맺기와 끊기의 욕구 불만을 절박하게 투영하며 버티는 이들의 지난한 심정을 누구도 비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날을 모두가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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