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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로 꿈꾼 영화'

악몽의 희열

<찬란한 내일로>

‘영화제작에 대한 영화’들이 되새기는 악몽의 원체험, 이제는 얼마간 진부한 은유로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꿈의 운동은 저 유명한 <8과 1/2>(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1963)의 첫 장면이다. 차들로 빼곡한 도로 위 자동차 안, 옅은 연기가 새어 나오자 한 남자가 절박하게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 광경을 말없이 구경하는 주변 운전자들의 사뭇 사악한 표정과 시선이 이 순간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그때 남자가 자동차 천장을 비집고 제 힘으로 탈출하더니 어느새 가볍게 날아오른다. 바람을 타고 구름 위로 떠올라 갑갑한 세속의 풍경으로부터 유유히 멀어지는데, 땅 위의 누군가가 남자의 발목에 걸린 밧줄을 잡아당긴다. 저항할 새도 없이 그가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악,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자, 영화감독이다. 구속과 한계, 자유와 권능, 그리고 추락. 아마도 꿈이 이어진다면 자동차 장면으로 돌아와 이 행로는 다시 시작되고 말 것이다. 추락의 결말을 안다고 해도 그는 기꺼이 운전대 앞에 앉을 것이다. 도입부를 가로지르는 상태의 극적인 변화는 ‘감독’이라는 세계의 공포, 환영, 욕망, 불안을 동력 삼아 불쾌한 희열, 피학적 아드레날린으로 춤춘다.

촬영 현장은 연출 경험이 미천한 감독만이 아니라, 거장들에게도 어김없이 두려운 장소라고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언젠가 봉준호는 한 강연에서 이와 관련된 감독들의 고백을 소개한 적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현장에 도착한 차에서 내리는 일을 가장 힘든 순간으로 망설임 없이 꼽았고, 안제이 바이다는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를 멈춰 세워 심지어 구토한 날도 있다고, 봉준호는 공감한다. “수백명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감독을 잡아먹을 듯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궁금하다. 그토록 괴로워하며 겨우 발을 내딛고 가까스로 대면하고 우여곡절 끝에 지나간 촬영 과정을, 그 악몽의 시간을 굳이, 다시, 영화로 소환하려는 창작자의 욕구 혹은 취향이란 대체 무엇일까. 두겹의 현장, 두겹의 카메라 사이에 포박되어 무엇을 상상하고 싶은 것일까. 더욱이 이들 영화는 작업을 방해하고 지연하는 성가신 사건 사고들, 그리고 이에 당황한 창작자의 얼굴에 진심으로 사로잡히곤 한다. 동시대 이탈리아 현실 안에서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로 감독 자신을 수다스럽게 응시하며 분열하는 난니 모레티의 <찬란한 내일로>(2023)는 오랜만에 그 의문을 경쾌하게 되살린다.

새삼 여기서 예술의 자기반영성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펼쳐보려는 건 물론 아니다. 다소 일차원적이긴 해도 나의 호기심은 영화 만들기라는 고행의 구조가 양산하는 영화적 쾌, 그 중심에 놓인 감독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정신세계에 언제나 더 가까이 있다. ‘영화 생산을 다룬 영화’는 대개 중단과 재개의 반복을 축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모험극이다. 단절의 괴로움과 좌절, 지속의 희망과 환영이 이 영화들의 에너지원이며, 비일관적이고 비선형적인 흐름은 필연적이다. 굳이 이름을 붙여 변덕의 장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창작자의 자기연민, 연민에 밴 자기조롱, 조롱이 동반하는 자기도취, 도취가 빚어내는 자기과장, 그러니까 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기애. 설상가상, 첩첩산중의 환경에서 점차 쪼그라들고 여러 겹으로 쪼개져 민낯을 드러내는 내적 형상, 그러니까 창작자의 널뛰는 리듬이 이 세계의 태생적 조건이자 심장이다. 이 장르는 본질적으로 코미디 감각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감독 자신이 출연하든, 배우가 그를 연기하든, 그 심장을 들추는 일마저 능청맞게 향유하는 자만이 감히 ‘영화에 대한 영화’의 배에 오를 것이다. 그러니 영화 속 감독의 초상이 더없이 소심할지라도 그를 가여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소심하게 부서질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건 실은 영화 밖 감독의 천연덕스러움과 대범함이다.

오래전 프랑수아 트뤼포가 직접 감독으로 등장한 <아메리카의 밤>(1973)이 개봉했을 때, 장뤼크 고다르는 “왜 극 중 감독만 유일하게 성교하지 않는 사람인가”라고 힐난하는 편지를 보낸다. 잘 알려진 일화 속 고다르의 비아냥 가득한 논조에 동조할 생각은 없지만, 수긍할 만한 점은 있다. “영화라는 건 뭔가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잠을 자는 이 직업은 뭐란 말이죠?” 영화 안에서 제작부장인 남편을 감시하러 매번 현장 구석에 얼룩처럼 자리한 아내가 토로한다. <아메리카의 밤> 속 촬영 현장은 좋게 말하면 사랑이 넘치는, 경박하게 말하면 짝짓기 행각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장소다. 그런데 감독만큼은 예외다. 그는 현장의 세속적 소용돌이에서 혼자만 비켜난 듯 중립적이고 도덕적이다. 따라서 무감하고 기계적이다. 제작과 관련한 물적 토대, 배우, 스태프, 자잘한 갈등과 감정을 망라하며 정신없이 출렁이는 이 영화가 희한하게도 뻣뻣하거나 느슨하게 느껴진다면, 혼돈의 현장에서 홀로 뒷짐 진 감독 탓이다. 적어도 ‘영화에 관한 영화’에서라면, 우리가 기대하는 건 성자 감독이 아니다. 차라리 약병을 들고 자신을 불쌍해하는 감독의 고질적 이미지에 더 다정한 마음이 생긴다.

지속의 환영

<찬란한 내일로>

영화 속 난니 모레티 곁에도 늘 약이 있다. <나의 즐거운 일기>(1993)에서 그는 심각하게 지속되는 피부가려움증으로 온갖 병원을 찾지만,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처방약만 늘어가며 갖가지 병명을 내세운 의사들의 공통된 결론은 우습게도, ‘심리적’ 요인이다. “다 내게 달린 거고 내가 문제라면 잘되긴 글렀다.” 그가 의기소침하게 내뱉은 속내는 마치 촬영 현장 앞에서 감독이 매일 같이 중얼댈 자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는 흉부 사진을 찍은 뒤에야 폐에 생긴 종양이 이 난리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카메라로 들여다보기 전에는 오진이 반복될 것이다, 병의 언저리, 엉뚱한 부위만 쓸데없이 긁을 것이다!

아마도 <4월>(1998)에서 모레티가 분한 감독 조반니가 카메라의 방향을 뮤지컬영화가 아닌, 현실에 맞추기로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우파 정권이 교체될 기회가 오자, 조반니는 원래 준비 중이던 1950년대 이탈리아 트로츠키주의자 요리사 뮤지컬을 즉각 중단하고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좌파는 승리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현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 후반, 알바니아 난민들이 탄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 실제 장면이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뒤, 다큐멘터리를 결국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조반니의 주눅 든 목소리가 들린다. 그가 요란하게 호소한 다큐멘터리 ‘눈’의 역량은 난민들을 잔뜩 태운 배의 거대한 이미지, 거기 뒤엉킨 수많은 현실 앞에서 무엇도 하지 못한다. 조반니의 침울한 결론은 그러나, 그가 갑자기 뮤지컬 현장으로 기운차게 돌아와 들썩이는 결말의 쾌감에 슬그머니 녹아 어딘가로 사라진다. 암담한 세계 이미지와 화려한 스튜디오 활기 사이의 깊은 간극을 조반니의 스쿠터가 정신없이 오간다. 그 산만한 궤적에 고스란히 몸을 맡긴 <4월>은 난니 모레티가 영화로 앓은 조울증이다.

<4월>에서 멈추고 망설이고 체념하다 시간을 다 보낸 감독 조반니는 <찬란한 내일로>에서 항우울제와 수면제로 버티는 노년이 되어 새 영화를 촬영 중이다. 그가 찍는 극영화는 1956년 소비에트가 스탈린식 통치에 저항한 헝가리 시민들을 무력 진압한 실제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이에 반발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특이한 점은 이탈리아 공산당 지부가 헝가리 서커스단을 로마에 초대해 공연을 연다는 설정이다. 첨예한 역사와 생기로운 오락의 공존. 헝가리 참극이 알려진 뒤, 서커스단은 연대의 의미로 잠시 공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다. <4월>의 조반니는 정치와 유희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으나, <찬란한 내일로>의 그는 둘이 맞물려 서로를 고무하는 세계를 상상한다. “서커스는 현대영화의 은유잖아요. 줄 하나에 매달릴 뿐 앞일을 전혀 모르니까요. 감독님 영화는 체제 전복적이에요.” 나중에야 빈털터리로 밝혀진 제작자의 논평은 허세 섞인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외줄에 의존해 몸의 활동을 최대치로 확장하는 놀이, 그 움직임만으로 세계를 초현실적인 우주로 만들어버리는 서커스는 모레티가 역사의 경직된 근육에 동원한 영화적 윤활유일 것이다.

조반니는 이 영화를 사랑의 서사로 접근하는 배우에게 이건 정치 이야기라며 한숨 쉰다. 그러나 사실, 그의 무의식에서 심오한 정치 강박은 노래와 춤의 유연한 감정에 번번이 지고 만다. 이를테면 서커스단이 떠난 뒤, 공산당원들의 이별을 촬영하는 대목에서 조반니는 대사가 끔찍하니 말을 없애자고 고집한다. 배우의 반박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그는 다시 ‘액션’을 외친 후에도 어쩐 일인지 배우들 곁에 선 채, 카메라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때 음악이 흘러들어 조반니의 앞선 꿈 혹은 환상 속 연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풀밭 위에서 춤추는 광경이 펼쳐진다. 다시 촬영 현장으로 돌아온 장면에서 조반니와 배우들은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프레임을 무너뜨리듯 스태프들쪽으로 횡단한다. 이제 모두가 음악에 맞춰 뱅글뱅글 도는 움직임만으로 자유롭다. 안과 밖의 경계를 가볍게 지우고 말의 번잡함을 증발시켜 수평적 운동의 흥취만 남겨두는 춤과 노래. 그것은 빈번한 충돌, 중단, 단절로 시름하는 영화 현장에서 감독이 꿈꾸는 연결과 지속의 마법이다. <4월>의 조반니는 뮤지컬영화를 찍고 싶어 하지만, <찬란한 내일로>의 그는 뮤지컬의 일부가 된다.

저마다 지속의 환영과 열망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 한국영화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하는 <거미집>(감독 김지운, 2022)에서 감독 김열의 집착은 영화 후반부 불타는 실내에서 벌어질 복수 행각을 하나의 숏으로 구현하는 플랑세캉스로 향한다. 최종 목적지로의 과정에서 일어날 돌발 사건을 차단하기 위해 스튜디오 출입구는 폐쇄되고, 소란 피우는 이들은 술 먹여 기절시킨다. 마침내 김열은 세트가 불길에 완전히 주저앉기 직전까지 카메라를 돌려 플랑세캉스에 성공한다. 그가 몰두하는 플랑세캉스는 영화의 시간과 동선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려는 야심이며, 자본과 검열의 간섭, 무엇보다 그 자신의 열등감으로 휘청이는 영화에 새겨둘 감독의 권위다. <거미집>에서 그가 주변을 잿더미로 만들며 거머쥔 지속의 힘은 과시적 긴장감으로 팽만하다. 그에 비한다면 <찬란한 내일로>에서 조반니가 노래와 춤으로 실현한 그것은 얼마나 소박하고 간단하고 부드럽게 작동하는가.

물론 조반니의 내면에 꿈틀대는 지속의 욕망이 언제나 화창한 건 아니다. 그가 젊은 감독의 현장에서 일으킨 기행이 그 예다. 한 남자가 무릎 꿇은 상대에게 총을 겨누는 마지막 장면의 촬영이 시작되자, 조반니는 갑자기 카메라 앞에 끼어들어 이 구도의 상투성을 지적한다. 폭력의 재현 윤리를 일갈하는 그의 논리는 대개 옳지만, 그러한 이유로 별반 새롭지는 않다. 정작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장황하게 떠드는 동안 현장의 모두가 어느새 졸음에 빠지고 마는 상황이다. 상업영화 시스템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훼방하는 조반니의 퍼포먼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칙’과 ‘일관성’ 없는 천박한 엔터테인먼트 현장을 고리타분한 일장 연설로 잠재운 시도, 무려 8시간이나 지속한 필리버스터, 그것이 이 장면의 핵심이다. 그는 맨몸으로 자본의 시간을 불시에 중지시킨 후 그 자리를 자신의 영화론으로 버텨본다. 현장을 나서는 조반니의 뒤로 촬영은 신속하게 재개된다. 총격 장면은 그의 열변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단번에 자극적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서 벌인 나르시시즘적 만용은 희극적이되, 왠지 초라하지는 않다.

만약에, 영화

<찬란한 내일로>

‘영화제작에 대한 영화’가 닿고자 하는 가장 행복한 결론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이 무엇을 찍었는지도 모르는 채, “근래 본 영상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는 스냅 사진 기사, 영화와 사랑 모두를 쟁취하고도 여전히 어리둥절하기만 한 광대, 내내 어깨에 짊어진 낡은 카메라 눈과 자기 눈이 기이하게 닮은 사실을 혼자만 모르는 감독, 그러니까 <카메라맨>(1928) 속 버스터 키턴의 초상 같은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너무도 영민한 우리의 감독들에게는 오지 않는다. <찬란한 내일로>의 조반니는 애초 결연하게 준비했던 주인공의 자살이 영화의 끝이 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망연자실한다. “역사는 ‘만약에’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바로 그 ‘만약에’로 역사를 만들고 싶다.” 처음에 그 말은 무책임하고 순진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 앞에서 그 섣부른 생각을 금세 거둘 수밖에 없다. 조반니의 ‘만약에’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문을 과감히 두드려 새롭게 열어낸다. 모레티의 ‘만약에’는 감상적인 공상이 아닌, 진취적인 상상이다.

당 간부들에게 헝가리 혁명 편에 서길 요구하며 거리를 꽉 채운 공산주의자, 서커스단원, 조반니 무리는 소비에트연방과의 결별이 공표되자 붉은 깃발 아래, 관악단의 연주 안에서 환호한다. 떠들썩한 행렬은 이어진다. 조반니의 영화에 나온 배우들, 참여한 스태프들, 서커스단 코끼리, 조반니에게 이별을 고한 아내, 폴란드 대사와 결혼을 앞둔 딸, 한국 제작자들, 사기꾼 제작자, 여기 더해 모레티의 지난 작품들에 출연한 노년의 연기자들, 그리고 사진으로 부활한 레온 트로츠키. 역사와 영화와 현실 구석구석에서 환하게 깨어난 존재들이 씩씩한 발걸음으로 행진한다. 이들은 유령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따져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나의 즐거운 일기> <4월> <찬란한 내일로>의 투덜이 감독은 이 순간, 자동차와 스쿠터와 전동 퀵보드 없이도 완연히 다른 지평에 와 있다. 한치의 망상도, 몽상도 들어설 여지없이 쨍한 길 위에 그가 있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손 흔든다. 무엇보다도 찬란히, 함께 걸으며.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의 육체와 마음을 비평의 기억과 선율로 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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