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열등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있다고 믿으며, 전자를 증식시키고 후자를 도태시킴으로써 종 전체 혹은 집단 전체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과학의 한 분과로 여겨지며 크게 유행하지만, 나치즘의 ‘인종 위생학’과 일부 국가들의 장애인 및 특정 집단 불임 시술 등의 끔찍한 결과를 낳은 뒤 엄청난 도덕적 비난과 함께 쇠락한 바 있다.
하지만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이 따로 있다는 사회 이론의 맥은 경제학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초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개발된 ‘인간 자본’ 이론은 인간은 ‘생산성’ 혹은 수익 창출 능력에 있어서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자본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은 그러한 능력의 근원을 유전자에서 찾지 않는다.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 자본’은 오히려 교육, 훈련, 인격의 도야 등을 통해 후천적으로 ‘조성’되는 것임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을 구별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리고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등 전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득과 자산을 가져가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보다 더 많은 삶을 누릴 권리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그 두 종류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더 많은 삶’의 불평등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정지훈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저서 <0.6의 공포, 사라지는 한국>에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아이 중 저소득층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10명 중 1명 정도이며, 나머지 9명은 중산층 이상이라고 한다. 가난한 집일수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이러다가는 ‘유전자녀 무전무자녀’라는 말이 생길 판이라는 것이다.
앞의 우생학 이론과 ‘인간 자본’ 이론의 공통성과 연결해보면 섬뜩한 명제가 머리를 스쳐간다. 지금 대한민국은 우생학 프로젝트의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대한민국에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국가 폭력이 폭주하는 것도 아니며, 옛 스웨덴처럼 대규모 불임 시술이 강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사력을 다해 벌이는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우월한’ 이들과 ‘열등한’ 이들이 선별되며, 이것이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으로 이어진 뒤, 급기야 생물학적 재생산에 대한 접근으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 대한민국은 시장경제에서의 불평등을 무한히 정당화하는 ‘인간 자본’ 이론을 매개로 하여 사실상 ‘잘난 사람들만 남고 못난 사람들은 도태되는’ 우생학의 실험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추세의 귀결로 미래의 대한민국은 ‘더욱 생산성이 뛰어난 집단이 될 것’이라는 기괴한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설령 그러한 바람이 실현된다고 해도 이는 기껏해야 ‘생산적인’ 디스토피아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