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오랜 친구 둘이 있다. 홍과 박. 그들과는 5살 때 만나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을뿐더러 거의 모든 방과 후 활동을 함께했고, 부모들끼리도 친해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박과는 같은 중학교를 다녔고, 홍은 중학생 때부터 다른 학교를 다녔지만 모든 학원을 같이 다녔다.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같은 선상에서 서로의 곁에 있다.
박은 어렸을 때 식사를 굉장히 느리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그녀는 항상 맨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급식을 먹었었고, 나는 기다려주었다. 어느 날, 언제나처럼 밥 먹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느리게 먹는 박이 정말 신기해서 계속 관찰했다. 여러 번 씹기도 했지만 식사하는 것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주 천천히, 다음 숟가락을 들기까지 오래 걸리는, 먹어야 해서 먹는 것 같았다. 먹는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 그녀는 연구 대상이었다. 말도 별로 없었던 그녀는, 오랜 식사 시간이 끝나면 갈까? 라고 하며 가방을 챙겼고, 우린 별다른 대화 없이 하교했다. 그랬던 그녀는 지금, 셋 중에서 맛집을 가장 많이 알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옛 기억 속 그녀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난 그녀에게 이따금씩 속 깊은 이야기를 한다.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다이어트를 한다는 명분으로 매일 저녁 공원을 걸었다. 걸으면서 오고 갔던 무수한 대화들. 진로, 연애, 친구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깜찍하지만 당시에는 무거웠던 고민들을 진지하게 나눴었고, 언제나처럼 결론은 ‘엄마한테 말하면 안돼!’였다. 지금도 그 결론은 유효하다. 묵묵히 들어주다가 집에 가기 전 어깨를 툭툭 치며 건네주던 말. “괜찮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힘내.” 내 편이 되어서 해주는 이 말이 나에겐 무척이나 소중했다. 물론 중간중간 의견이 달라 서로를 이해 못할 때도 있지만 결국에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가끔 저 말이 듣고 싶어서 뜬금없이 전화할 때도 있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박의 뿌리 깊은 심지는 더 깊어지고, 가지각색의 잎과 열매는 더욱 풍성해지고 있었다. 몰라보게 달라지기도, 놀랍게도 그대로이기도 한 박.
홍은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다. 공부도 제일 잘했고, 제일 재밌는 놀이를 했었고, 강아지도 제일 먼저 길렀다. 모두가 홍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은 신경 하나 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가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서로 극 반대의 성향이라고 느꼈던 홍과 나는 서로를 신기해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몽상가 기질이 있었고 홍은 차분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시니컬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간지러운 이야기를 못 견뎌했다.
23살 여름이었다. 나는 그해, 지독한 병을 앓고 있었고, 스스로를 파괴할 때가 많았다. 우연히 홍과 나는 파리에서 만났고, 성인이 되고 거의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술을 마시며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취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홍이 말했다. “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널 살려달라고 기도했어. 넌 정말 괴로웠겠지만 그래서 내 기도가 이기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 이기심이 널 살릴 수 있다면 난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래.” 덤덤히 내뱉었던 이 말은, 나를 구제하기에 충분했다. 수년이 지났지만 촉촉하게 젖었던 그날 밤은 아직도 선명하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홍은 사실 타고나게도 따듯하고 용감했던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홍과 박을 만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중학생 그 언저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던질 수 있는 실없는 농담들, 단어 하나로도 몇분을 박장대소할 수 있는 순간들, 몇십번을 추억해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 이것들이 20여년간 큰 성벽이 되어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감히 말할 수 있는 무조건적 사랑.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홍, 박과의 시간들은 나의 큰 자랑이 되었다. 그리고 배우 생활을 하는 나에게 큰 버팀목이 됐다. 모든 것이 숨 막히고, 벗어나고만 싶을 때, 홍과 박은 기꺼이 나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가끔 현실에서의 김민하와 배우로서 김민하의 괴리감을 느낄 때 순도 100%의 나의 본모습을 일깨워주며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끔 해준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말이다. 예를 들어 극 중 역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나는 홍과 박을 찾아갔다. 평범한 대화를 나눌 뿐이었지만 이는 현실의 나로 빠르게 복귀시켜주었다. 진짜 내가 누군지, 대화 중 내 입으로 내뱉는 나만의 단어들이 극 중의 ‘나’와 현실에서의 ‘나’를 분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는 그 순간들이 결국엔 진정한 ‘나’를 만든 것이었다.
또 다른 25년 후에는 어떨까. 2049년 여름, 홍과 박은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을까. 도무지 지겨워지지 않는 그들과의 이야기에는 유난히도 사랑이 가득하다. 열정적이기도 하고 담백하기도 해서 끊이질 않는다. 어찌 보면 항상 곁에 있어서 당연한 줄 알았던 그들은, 사실 나에겐 복이다. 참 특별해서 닳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핑계 삼아 전하지 못했던 고마운 마음. 너희는 나의 소중한 발자취이자 앞으로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어 간직한 여백이라고. 그리고 작게나마 나도 너희의 영원한 품이 되리란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낡은 앨범 속을 뒤적이면 개구쟁이 세 소녀의 웃는 얼굴이 담긴 사진들이 많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사진들도 있지만 순수하고 웃음만을 위한 웃음을 짓는 표정들을 보면 피식 웃게 된다.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건, 큰 재산이라는 것을 갈수록 많이 느낀다. 비록 어떻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멋쩍게 밥이나 먹자며 건조한 연락을 할 테지만. 오늘도 그들과의 단체 채팅방에는 짧은 웃음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