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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클럽>에 붙이는 사건 노트: 소마이 신지와 위장의 시간, 80년대 시네필에게 남은 소마이 신지의 자국들
김예솔비 2024-06-25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전 프로그램으로 소마이 신지의 회고전이 열렸다. 소마이 신지의 회고전이 일본 바깥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전주영화제에서는 소마이 신지의 13편의 영화들 가운데 8편을 소개했다. 2012년에는 에든버러국제영화제에서 크리스 후지와라가 소마이 신지의 회고전을 마련했다. 이후 국내에서 소마이 신지를 소개하는 자리가 몇 차례 더 있었다. 2018년에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21년에는 영화의전당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이 이루어졌다. 이런 노력들의 결실로 지금 우리는 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편집자 주-소마이 신지 회고전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시점에 대하여 일부 사실 관계의 보충이 필요하여 추가, 수정을 하였습니다.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 정수완 수석프로그래머의 주도 아래 기획전과 110여 쪽 분량의 책자가 발간된 바 있습니다.) 오늘날 기획 영화가 추구하는 ‘합리성’과는 너무도 먼 <태풍클럽>의 활력과 동시대 영화 사이에 놓인 거의 비가역적인 거리를 곱씹다보면, 과연 <태풍클럽>보다 덜 정제된 <숀벤 라이더> 같은 영화가 오늘날의 제작 환경에서 수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은 추후에 기약하기로 하자. 그보다도 먼저 동시대 일본영화에 끼친 시네필적 영향력으로서 소마이 신지(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셔널 시네마로서 일본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상당 부분 서구에서 수용되어온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전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지만 이것 또한 일단 제쳐두자.

소마이 신지의 전작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고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영화를 조명하거나 재발견하는 성실한 비평을 수행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어쩌면 “개봉 시점에서 그에 맞는 대응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골치아파진다”(하스미 시게히코)고 리얼타임 비평을 권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일종의 카운터펀치 같은 대응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솔직한 심정을 덧붙이자면 이미 나와 있는 분석보다 더 정교한 방식으로 소마이 신지의 연출과 그 세부를 파악할 자신은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제작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태풍클럽>의 개봉을 하나의 사건으로 다룰 수 있는지의 문제다. 단순히 비교적 덜 알려진 감독의 중요한 영화를 다시 본다는 회고적 계기가 아니라(이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장이 반응하고 참조해야 할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현행적인 사건으로서 <태풍클럽>을 비평적 실천의 계기로 삼아볼 수 있을까.

달아날 시간, 달라질 시간

소마이 신지가 영화를 제작했던 80년대의 일본영화는 확실히 이상한 시간이었다. 범주화된 시간의 분류로부터 빠져나가는 모호함은 종종 ‘이상함’으로 치부되곤 하니까. 60년대에 성행했던 스튜디오 중심의 영화 제작 방식이 와해되고 점차 현대 영화로 이행되는 전환기에 활동했던 소마이 신지는 “현대적 작가로 보기에는 촬영소의 그림자를 갖고 있고, 촬영소 소속 감독이라 보기에는 너무 현대적”(후지이 진시)이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소마이는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 좀처럼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마이 신지는 70년대부터 닛카쓰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소위 현장의 이단자들과 팀을 이루면서 촬영소의 계승과 변혁을 동시에 고민했다. 소마이의 비가시성은 특정한 지형에 위치지어지지 않으려는 위장술이다. 즉, 촬영소와 인디펜던트라는 양극단의 중첩 속에서 제작 방식의 긴장을 숏에 도입했던 영화감독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면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풍클럽>에 대해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작 방식의 긴장을 수용하는 장소로서의 숏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소마이적 스타일로 자주 거론되는 롱테이크를 빼놓을 수 없겠다. 소마이의 영화는 종종 인물을 멀리서 관조하며 다면적인 상황으로 변모하는 롱테이크를 구사한다. 동아시아 영화연구자 에런 제로는 인물들과 카메라의 거리가 일종의 잔인함을 구성하며, 그 자체가 소마이의 영화가 다루는 청소년의 잔혹함에 근접한 것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소마이의 세계는 구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나 <숀벤 라이더>에서는 “항상 다음 장소로 달아남으로써 구체성을 획득한다”. 아이들은 카메라의 문법이 손을 뻗치기 전에 가차 없이 이동해 있다. 소마이 신지 영화의 구체성은 인물의 심리나 동기와 같은 이야기의 차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화면의 운동과 그러한 운동을 촉발하는 이야기 사이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선이다. 그의 카메라는 그 선을 자의적으로 다루지만 결코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으면서 의미화되거나 추상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소마이의 스타일로 여겨지는 길고 동역학적인 동선을 포착하는 롱테이크에서 인물들이 언제든지 달아날 수 있다는 전조는 시공간의 급작스러운 비약을 이야기의 구체성으로 설득하는 기이한 순간을 자아낸다.

<숀벤 라이더>에서 납치를 당한 동급생을 찾아나서는 세 아이들의 동선은 야쿠자의 세계를 뒤쫓게 되면서 복잡해진다. 얼핏 보았을 때 <태풍클럽>은 <숀벤 라이더>보다는 현저하게 구체성을 띠고 있다. 장막 구성으로 갑작스러운 비약을 들이거나 시공간을 거의 게릴라적으로 다루고 있는 <숀벤 라이더>와 달리 <태풍클럽>은 적어도 학교의 안과 밖으로 구획된 세계의 판본을 따른다. 영화의 무대는 수영장과 체육관,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계속해서 변모하지만 오히려 고립의 상태를 강조할 뿐이다. 달아날 수 없는 상태는 달아남의 충동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터져나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응축한다. 이때 아이들의 신체를 멀리서 포착하는 롱숏은 관객이 보아야 하는 것을 명확히 지시해주지 않으며, 심지어는 놓칠 수도 있다는 불확정적인 상태와 동기화된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터져나오는 청소년기의 우울은 의미화되지도 않고, 포착될 수도 없으면서 화면과의 긴장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구체성의 감각으로 제시된다.

고립이라는 상황은 사실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매우 예외적인 상태다. 약간의 과장을 동원하자면 소마이적 인물이란 항상 어딘가로 달려나가면서(혹은 춤을 추면서) 프레임을 절단하는 존재들(아이들)이다. 이러한 인물의 전제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사>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렌은 거의 매 순간 달리고 있다. 성장과 아이 사이에서 서툴게 분투하는 렌의 사랑스러움으로 무장하던 영화가 일순간 흐트러지는 것은 렌이 달리기를 멈출 때다. 부모의 일방적인 이혼 통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렌은 짐을 싸들고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방 밖에서는 부모가 말다툼을 벌이고, 방 안에 있던 렌이 소리를 치자 엄마의 팔이 방의 유리창을 깨뜨린다. 유리창의 파열음과 거의 동시에 피가 흐르는 팔이 화면을 횡축으로 요동치게 하기 위해 방의 안과 밖의 경계에 카메라의 구도가 자리 잡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을 테다. 달리기가 더이상 화면의 활력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그러한 불능의 상태는 반드시 다른 형태의 힘으로 화면에 출현해야 한다.

<태풍클럽>에서 아이들의 고립은 폭력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물론 이 영화에서 제련되지 않은 잔인함은 단순히 화면의 역학일 뿐 아니라 청소년기 자체의 에너지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을 통제로부터 빠져나가는 활력의 분출을 화면의 요소로 다루는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태풍과 아이들은 유사한 속성을 지닌다. 스튜디오 바깥에서 태풍을 묘사하는 것은 사실상 어마어마하게 비합리적인 제작 방식이다. 날씨의 변화를 연출에 활용하곤 했던 과거 촬영소 시대와 달리 현장 로케이션에서 자연 자체를 통제한다는 것은 제작의 모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태풍이 잠시 그친 사이 운동장으로 나온 아이들이 다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속옷 차림으로 춤을 추는 장면은 롱숏으로 촬영되었다. 근방의 수도가 말랐다는 비화가 있을 정도로 상당한 품이 들었을 것이다. 후지이 진시의 말처럼, 소마이 신지는 이런 고생을 함으로써 뭔가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인물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촬영 현장 자체의 열기”라고 말한다. 소마이 신지는 과거 촬영소 시대의 관습을 현장 영화의 제작에 도입하려 할 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제작의 ‘비합리성’을 화면 자체의 동력과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고민한 감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마이 신지가 “자신도 컨트롤할 수 없는 순간을 이끌어내기 위해 롱테이크를 구사한 것이 아닐까”라고 전한 후지이 진시의 주장은 무척 중요한 대목이다. 일본영화의 80년대는 나름대로 우연적인 것의 긴장을 영화의 현장에 끌어들이면서 스튜디오의 촬영 방식이 어디까지 작동하거나 무너지는지 가늠해보면서 영화제작의 외연을 실험해보던 시기였던 것 같다. 넘치는 물과 집어삼키는 불,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다루는 것은 소마이 신지만의 특권은 아니지만 흔히 주제론적으로 일축되는 소마이 신지의 아이들 영화가 제작 방식과의 긴장 속에서 나타난 독특한 효과였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사전에 설계된 무대적인 연출을 선호했다. 보다 정확히는, 그러한 무대의 인위성을 화면에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비교적 덜 다뤄지는 소마이적 스타일 중 하나는 그가 사운드를 매우 자의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화면에 보이는 것보다 소리가 가까이 있거나 화면상에는 작게 머무는 사물의 소리가 과장되어 들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무대의 인공성이 서사적인 차원에서의 비약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구체성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서사에 한정되기보다는 이야기의 차원을 초과하는 어떤 정념과 그것의 세부를 감각하게 하는 영화적 체험에 유사하다. 가령 <태풍클럽>에서 일탈에 실패한 리에가 밤을 헤매는 여정에서 느닷없이 피리 부는 남녀를 마주치는 장면이 그렇다. 매우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그 장면에서 리에가 달아나는 것은 자신이 서 있던 곳이 무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슬픔과 80년대

아오야마 신지는 <숀벤 라이더>를 두고 아이들이 경계를 드러내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존재로 계속 남아 있을 거라는 점에서 슬픔을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촬영소라는 이전 세대의 그림자 아래서 그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는 영화를 만들었던 소마이 신지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의 세계도 아닌 청소년기라는 정체성과 예민함의 정서를 공유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러브 호텔>은 세대의 단절과 성장의 충동이라는 사춘기적 긴장을 어른의 세계에 불러들이려는 시도다. 이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거울과 섹스는 “거울과 섹스는 사람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럽다”는 보르헤스의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세대와 세대 사이를 단절하려는 시도는 항상 청소년기의 우울을 동반한다.

영화를 만드는 모든 학생들이 소마이 신지를 의식하며 영화를 찍었다는 아오야마 신지(아오야마 신지의 모든 영화를 촬영했던 다무라 마사키는 <숀벤 라이더>의 촬영감독이었다)와 하시구치 료스케의 증언처럼(하시구치 료스케는 <태풍클럽>과 청소년기의 열기와 혼란이라는 테마라는 점에서 닮아 있는 <모래알처럼>을 만들기도 했다) 소마이 신지는 80년대 일본의 시네필 문화 속에서 성장한 세대의 감독들에게 모방의 충동을 자극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청춘과 함께 기억되어온 시네필적 열정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마이 신지처럼 찍고 싶다는 열망에는 롱테이크에 대한 모방의식도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그러한 도식으로 한정해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이 얼마나 허구에 가까운지는 이미 많은 필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영화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그의 스타일이 정전화되기는커녕 계속해서 새로운 독해를 발굴하게끔 하는 충동을 자극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새로움이라는 테마를 갱신하고 있고, 그러한 충동과 더불어 영원히 동시대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영원히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행적인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의미”(자크 오몽)라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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