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려야 하루를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기분으로 흘린 눈물이든 다 괜찮다. 어제는 달팽이 경주에서 보호자들이 달팽이를 격려하는 말들을 보다 울었다. ‘침착해, 네가 가야 할 곳에만 집중해야 해. 다른 달팽이들은 신경 쓰지 말고.’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가 찡해진다. 이때 감정을 억누르거나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하면 안된다. 갑갑한 일이든, 분한 일이든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면 마음의 고름을 짜낸다는 생각으로 개운하게 흘려야 한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면 오늘 내 하루가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이상이 내 정신의 코어를 장악하고 있었다. 감상에 빠져 훌쩍이는 것은 게으르고 안일하다고 느꼈다. 감정적인 공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 ‘T’야?” 하고 비난을 섞어 묻는 것이 지금 시대의 유행이지만, 나는 그보다 한참 앞서 주변 사람들에게 ‘비정하고 차갑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나는 그냥 위로가 필요해. 나랑 같이 울어줄 친구가 필요하다고.” 그럼에도 나는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깊게 굴을 파고 들어앉아 우는 친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움에 빠진 친구의 일을 해결하려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그럼 내가 한 노력들은 뭐가 되지? “넌 평생 외로울 거야.” 친구에게 독하게 상처를 주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후 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처음엔 내가 받은 배신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내가 배신감이라 생각했던 아픔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로 평생 외로워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었기 때문에.
친구를 처음 만난 건 학교를 자퇴한 후 입학한 대안학교에서였다. 누군가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어?’ 하고 물으면 ‘고등학교 동창’이라 하곤 했지만 그건 우리만 알아듣는 농담이었다. 17살에 학교를 자퇴한 우리가 만난 곳은 고등학교도 아니었고, 전교생이 스무명도 되지 않아 동창이란 개념도 희박한 곳이었다. 나는 그마저 1년을 채 다니지도 않고 탈출하듯 그곳을 떠났으니 친구와 내가 만나 함께한 공간과 시간은 쉽게 특정할 수 없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공부하던 친구와 영화 연출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대학에 가는 것만이 목표가 된 나는 공통점마저 사라져 내내 다른 무리에서 놀았다. 그 친구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수년 후, 내가 방 안에 갇혀 밖을 나오지 못할 때였다.
처음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질문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대학을 선택한 것인데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를 만난다면 분명 다시 괴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생각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속세와 멀어지기를 택한, 이전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살고 싶었다. 그런 무시와 경멸이 자연스러운 사람들 사이에 이질감 없이 섞이고 싶었다. 그들에게 끝내 합류할 수 없을지라도, 내가 동참할 혁명의 기회 또한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내 삶의 모든 원동력이자 족쇄였다.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에 발이 묶인 나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홀로 방 안에 갇혔다. 10통, 50통, 100통. 친구는 끈질긴 용사처럼 문자와 전화로 내 방문을 두드렸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삐지고, 세상이 자길 몰라준다면 늘 한숨을 쉬는 아이. 헤매더라도 같이 헤매자고 애걸복걸을 하고, 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냐며 묻던 아이. 철이 없고 딱하다고 여겼지만 사실 세상 그 누구보다 용맹하게 나를 구하려 했던 나의 친구.
그 뒤로 우리는 서로의 어설픈 동창이 되어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친구는 늘 무언가를 해야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전시를 하고, 모델이 되고, 잡지를 만들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친구가 스스로를 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이 염려되었다. 친구는 늘 너무 많은 일에 공감을 했고, 자신이 어렵게 낸 용기에 번번이 데여 울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좌절을 가까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나는 서툴게 움직였다. 내가 너의 슬픔을 해결할 수 있다면. 내가 너를 괴롭히는 사람들만큼 힘이 센 사람이었다면. 나는 늘 공감 대신 설득을 하고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친구의 슬픔은 나와 차원을 달리했다. 친구는 죽음을 보며 자주 울었다. 자신의 주변의 죽음부터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의 죽음까지 모두 자기 일처럼 아파했다. 그래서 친구는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말하고 움직였다.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세상은 친구가 그 슬픔을 이용한다고 쉽게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친구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흘려야 할 눈물을 참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눈물을 참으며 친구보다 한참이나 작은 사람이 되어갔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원더걸스는 여성 아이돌 시장의 공백기에 <Irony>라는 타이틀로 등장했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5명의 소녀들은 ‘Wonder’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섹시하게 개량된 교복을 입고 있어도 내 눈엔 늘 그들의 말간 두려움이 먼저 보였다.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라고 지어진 이름처럼 ‘원더걸스’는 활동 내내 멤버가 수없이 교체되는 질곡의 시간을 보내며 꽤나 다양한 형태로 놀라움을 안겼다. 팀의 센터였던 ‘야생마’ 현아가 일찌감치 이탈한 뒤, 유빈을 영입한 원더걸스는 <Tell me>와 <So Hot>을 ‘K팝 역사’에 빠질 수 없는 곡으로 등극시킨 뒤 최정상의 자리에서 원더걸스를 모르는 ‘노바디’를 위해 미국에 진출했다.
쉽지 않은 미국 활동 중 선미가 돌연 학업을 이유로 팀을 탈퇴하고, 혜림이라는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다. <2 Different Tears>는 바로 그 시기 발매된 노래로, 여전히 미국 내 활동에 집중하고 있던 원더걸스가 국내 팬들에게 멤버의 교체를 알리며 내놓은 일종의 서비스 같은 곡이었다. 80년대 레트로 음악에 ‘외계’와 ‘우주’의 이미지를 가미한 곡은 당시 멤버들의 의상만큼이나 난해했다. 가죽, 스팽글, 데님, 도트 프린트. 촌스럽다고 여겨질 만한 재질을 마구 뒤섞어 입은 그들은 정말 지구의 유행에 대해 생전 들어본 적 없는 행성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자, 눈물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단다.” 외계인들은 깃털을 붙인 손톱으로 ‘V’(브이)자 모양을 반짝반짝 그리고는 기뻐서 흘리는 눈물과 슬퍼서 흘리는 눈물에 대해 말했다. 슬퍼할 줄도 모르고 기뻐할 줄도 몰랐던, 그래서 타인의 슬픔 앞에 늘 조급하기만 했던 나는 그 수상한 노래를 들으며 울고 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