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입학 직후 3월, 체육 교사가 배구공을 뿌렸다. 순간 한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말없이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언더핸드와 오버핸드를 번갈아 구사하며 우리는 무아지경이 되었다. 공이 땅에 처음 떨어진 것은 종이 울린 직후. 그 친구와 나는 국민학교 배구부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다. “한 시간은 기본이지.” “기억나냐? 떨어트렸다가 대가리 박고 컴퍼스처럼 돌았던 거.” 어릴 적 몸에 각인된 것은 여러 편의 시퀄을 연출했다. 배구부에서 높인 점프력으로 구미 지역 국민학생 높이뛰기 대회에서 3위를 했다. 강원도 전·의경 체육대회에선 최우수 공격수였고, 대학 수업 때는 체대생들도 내 스파이크와 서브를 받지 못했다. 지방의원 시절에는 주부배구팀의 트레이너였다. 요즘은? ‘직관’은 곧잘 갑니다, 끙.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전문 코치가 부임해왔다. 라이트 공격수 겸 블로커로 발탁됐다. 주 44시간짜리 동계 훈련은 질적으로도 ‘지옥 훈련’이었다. 시대에 걸맞게(?) 몽둥이도 난무했다(20대 중반이던 코치는 코트 밖에선 다정했다. 우리 팀을 끝으로 그는 체벌을 자체 폐지한다). ‘1등주의자’ 교장은 연패하던 배구부를 압박했다. 경기 날 응원단도 안 보내주면서 말이다(6학년 2학기 교내 운동회에서 처음 응원이라는 걸 받아봤다. 도 대회에서 우승한 후배팀과의 대결. 후배팀이 이길 거라 믿었던 교장에게 우리는 완승으로 보답한다). 훈련 2, 3주 만에 7명만 남았다. 하고 싶었던 일이라 견딜 수 있었다. 집에서도 자기 전 혼자 훈련했다. 7할쯤 물을 채운 페트병의 윗부분을 찌그러트려서 잡고, 거울 앞에서 500회를 휘두르며 스윙 폼을 잡았다. 영화 대사대로다.
“좋아서 하는 것이 숙달로 이어진다.” 도내 우승 후보로 성장한 우리 팀은 1994년 3월31일을 맞았다. 이기면 준결승이고 지면 마지막. 상대 팀에 고의로 졸업을 연기해 중3과 동갑인 선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안 올 수도 있다”던 그가 등장하자 아이들은 동요했다. 네트 높이도 수상했다. 2m가 규격이고 훈련 때는 3~5cm 더 높이곤 했는데 그 경기는 2m10cm였다. 몸을 푸는 동안 우리 팀 스파이크가 적잖게 네트에 걸렸다. 1세트 9 대 15. 코치는 이를 갈 듯 경고했다. “지난달 졌을 때 울었지? 오늘 지고 나면 울지 마라.” 묘하게 멘털이 일어나며 추격이 시작됐다. 우리는 뒤늦게 알아챘다. 부정 선수 하나만 빼면 상대 팀이 우리보다 약하다는 것을. 도내 유일하게 블로킹 득점 실적이 있던 나는 절박함과 희망 사이로 점프했다. ‘저 형을 한번이라도 막는다면 역전이다!’ 하지만 그의 특기인 ‘좌우로 틀어치기’는 끝까지 내 손에 걸리지 않았다.
2세트 12 대 15. 선수들은 울지 않았지만 학교에선 호랑이 선생이던 감독 교사가 눈물을 터트렸다. 체육관 바깥 어둑한 곳, 쓰레기 한점 없지만 쓰레기장 느낌 나는 곳에 집합했다. 코치가 스포츠계의 악습에 덤덤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싸늘했다. “진 이유는 너희 자신한테 있다. 다신 오늘처럼 살지 마라.” 이후 30년간 겪은 세상도 쓰레기장이었다. 부조리가 있어도 싸움은 바로잡히는 법이 없고 점점 승산은 희박해진다. 그래도 나는 블로킹을 뜰 것이다. 득점에 실패해도 괜찮다. 상대의 범실 가능성은 커지고 수비하는 동료들의 부담은 준다. 이제 목표는 승리가 아니라 랠리.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지만 않으면 배구는 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