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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코프] 제주 복합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의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 전시 체험기, 순환하는 세계
이우빈 사진 백종헌 2024-05-13

에릭 오의 세계는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2010년대 무렵 국내 애니메이션계의 신성으로 주목받던 그는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경력을 거쳐 <오페라>(2021)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오페라>는 커다란 피라미드 속의 무수한 인간들이 서로 다투며 공멸하고, 이내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역사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작품이지만 에릭 오 감독은 “<오페라>를 전시 형식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열망을 7~8년 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 목표는 제주 애월읍에 있는 복합 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의 첫 상설 전시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를 통해 현실이 됐다. <오페라>를 포함한 에릭 오 감독의 <오리진> <오르빗> 등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압도적인 규모와 완성도를 자랑한다. <씨네21>이 방문한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의 체험기를 에릭 오 감독과의 인터뷰와 곁들여 전한다.

하우스 오브 레퓨즈에 가기 위해선 제주 애월의 깊은 산 중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가 주변에는 제주의 푸르른 숲이 펼쳐지고 저 멀리엔 바다가 머무르고 있는데, 이 제주의 자연 풍광은 에릭 오 감독의 전시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는 콘크리트 건물 내부에 피어난 각종 조경이다. 이끼, 고사리와 같은 고생대의 식물들이 공간 곳곳을 지배하며 풍기는 습기의 촉각과 으스스함은 “이제는 폐허가 된 어떤 문명의 유적지나 일종의 던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페라>를 비롯한 전시 작품들이 인류, 사회의 기원과 흥망성쇠를 들추어내는 작품”이기에 전시 공간의 분위기로도 유사한 뉘앙스를 전하려 한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강하게 귀를 때리는 전시장의 앰비언스와 작품들의 효과음 역시 압도적이었다. BANA의 음악 프로듀서이자 앨범 <>으로 한국대중음악상을 휩쓸었던 250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의 모든 작품은 “5분 안에 낮과 밤의 기승전결이 끝난 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이클”로 동시에 재생된다. 이 5분의 시간에 맞춰 “온 공간의 음악이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연주”된다. 각 방 사이의 벽엔 커다란 구멍이 의도적으로 뚫려 있어 각 작품의 음악이 자연스레 섞이게 되며, 관람객 각자가 자기만의 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우물 위의 천장에서 재생되는 첫 작품 <오리진>은 시각적 스펙터클의 위용을 드러낸다. <오리진>은 <오페라>보단 덜 서사적이고 더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에릭 오 감독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것인지”라는 커다란 3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리진>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감독의 풀이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미지의 태고, 생명의 근원을 “무언가가 태동하는 듯한 이미지”로 흩뿌린 것이다.

<오리진>을 지나고 나면 <오페라>에 가는 경유지가 이어진다. <오페라>에서 발췌한 듯한 애니메이션 일부가 벽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엔 역시 무성한 식물들이 자라 있다. 자연의 흙 내음과 콘크리트 건물의 세한 냄새가 섞이는 와중에 커다랗게 나 있는 창틀에는 제주의 햇빛이 내리고 있다. 이쯤 와서 느껴지는 것은 이 전시장엔 미술관에 으레 설치돼 있는 작품 설명이 없단 사실이다. 이는 “전시의 마지막엔 간단한 설명을 넣은 설명서를 제공할 테지만, 기본적으론 관람객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걷고 공간을 느끼길 바란” 에릭 오 감독의 의도다.

메인 룸에 들어가면 두 개의 커다란 <오페라>가 지하 성당의 프레스코화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하나는 극장 상영용과 비슷하게 프레스코화의 전체 모습을 원경에서 담아낸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며 특정 부분을 확대해 보여주는 영상이다. 동시에 흐르는 두 개의 <오페라>를 관람객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살피고 따라갈 수 있다. <오페라>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에릭 오 감독의 답변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 매일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적 문제와 현대의 단면들을 묘사”한 작품이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엔 종교, 왕정, 정치에 몸담은 캐릭터들이 보이고 그 아래론 학교, 공장, 감옥 등 각종 사회 시설이 마련돼 있다. 수많은 캐릭터는 타인을 부리고, 노동하고, 착취하고 착취당하다가 서로를 해치기에 이른다. 그렇게 5분이 지나면 인류는 사회를 재건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역사를 반복한다. 애니메이션 영상이 재생되는 바닥 아래는 마치 연못처럼 곡선을 이루고 있고, 관람객이 걷고 앉을 수 있는 계단의 모양 역시 유려한 곡선형이다. 딱딱하고 각진 콘크리트 천장 아래의 곡선들과 식물, 시시때때로 바뀌는 오묘한 빛깔의 조명들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복합적인 공간성을 자아낸다.

전시장의 마지막엔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신작 <오르빗>이 기다리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완전히 겹쳐 있는 5개의 스크린에서 5개의 애니메이션이 재생된다. <오르빗>은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상념을 담은 작품으로 “질서가 있는 것처럼 지속되던 <오페라>의 문명이 결국 무질서로 회귀한다는 순환의 의미”를 담았다. 우주의 여러 행성, 기하학적 구조물, 각종 오브제의 이미지, 빛과 어둠의 대조 등으로 만들어진 5개의 영상이 무한히 돌고 있다.

‘순환’은 에릭 오 감독이 작업 초창기부터 꾸준히 천착해 온 주제다. 첫 단편 애니메이션 <더 백>(2005)은 한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가방을 쫓고 죽어가지만,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이 다시금 가방을 쫓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 <심포니>(2008) <소통>(2009) 등으로 이어진 에릭 오 감독의 초~중기 작품과 후기의 작업물들 역시 늘 존재, 시간, 문명, 생명의 굴레를 역동적인 애니메이팅으로 구현하곤 했다. 그리고 <오르빗>엔 에릭 오 감독의 작품에 등장했던 가방, 사과, 열쇠, 쇠똥구리 등의 각종 이미지가 총집합 해있다. 이번 전시는 시공간이나 인류 문명의 순환에 대한 거대한 사유인 동시에 에릭 오라는 창작자가 만들고 있는 작품 세계의 흥미로운 순환이기도 한 셈이다. 에릭 오 감독의 초~중기 작품과 전체 필모그래피는 에릭 오 감독의 개인 홈페이지(https://erickoh.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릭 오 감독이 밝힌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목적은 “거두절미하고, 기술적인 요소를 다 떠나서 오로지 메시지 그 자체”다. 여기서 메시지란 “전시가 표현하고 있는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순환들, 그리고 그 안에 잡힐 듯 안 잡힐 듯 언어로는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로 해석된다. 이러한 메시지를 “애니메이션이란 예술의 확장성”을 토대로 만든 결과물이 이번 전시다. “솔직한 느낌에 따라 전시 관람의 경험을 각자의 이야기로 만들면 좋겠단 욕심”이 에릭 오 감독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건물 지하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면 제주의 울창한 숲이 눈앞에 펼쳐지고 맑은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하 유적지를 벗어나 맞이한 현실의 이미지는 왠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며, 전시의 감흥을 더욱더 크게 돋구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여운을 느끼다 보면 새소리가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아주 일정하게 들려온다는 것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전시를 건물 내부뿐 아니라 제주의 자연 바깥까지 연결하려는 에릭 오 감독의 속셈이었다.

한편 '하우스 오브 레퓨즈(House of Refuse)'는 지난 4월25일 제주 애월에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현재 미디어 전시장을 비롯한 카페 및 빈티지 장난감 숍이 운영되고 있다. 이후 의류 편집숍, 예술영화관 등 다양한 문화공간과 함께 전시, 음악 페스티벌, 영화제 등의 이벤트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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