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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늑대의 유혹> 이후 배우 이청아의 20년 ② - 20대 이청아의 버티기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4-05-17

-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출신이지만 데뷔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했다.

= 데뷔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2002년 명동에서 부지영 감독님 단편영화 <눈물>에 길거리 캐스팅된 거니까. 그렇지만 아버지(연극배우 이승철) 배우라는 직업 자체엔 무척 익숙했다. 내게는 학로 분장실이 친숙한 공간이었고 연극도 일찍부터 많이 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헤롤드 핀터의 <배신>을 본 기억이 난다. 한양대 연영과에 들어갈 때 연극이 아니라 영화 연출을 전공한 것도 내딴에는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보고 싸이더스에서 소속사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했을 때 아빠는 반대했고 엄마는 해보라고 했다. 적은 돈이지만 계약금의 효과였던 것 같다. 배우 일을 하면서 아버지가 남매를 건사하는 일이 녹록치 않으셨으리란 걸 지금은 안다. 어쨌든 처음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덜컥덜컥 붙으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행운이 주어진 셈이다.

- 일찍 데뷔해 또래보다 먼저 사회생활의 고충이나 직업적 고민을 겪는 과정은 어땠나.

=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덜 된 상태로 현장에서 모든 걸 처음 겪었기 때문에 확 움츠러든 시기가 있었다. 대학 다닐 땐 그냥 없는 사람이고 싶은 날들이 많았다. 데뷔 후 학교에도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 유명하지도 않은 배우가 생색을 낸다고 욕먹기도 하고… 보여지는 자리에선 언제나 프로페셔널하게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배우도 누구나 그렇듯 그저 숨고 싶은 날들이 있다.

- 200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끈 귀여니 소설 원작 영화의 여자주인공으로 데뷔한 이후 유난히 발랄한 이미지로 풀이됐다.

= 최형인 교수님께 연기 수업을 받을 때면 나는 항상 비극 위주로 독백을 준비해가는 학생이었다. <늑대의 유혹> 전이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비극 연기는 이만하면 충분하니 넌 앞으로 희극만 해라.” 내게 없는 무언가를 그때 정확히 보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대사를 외우면서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러다 데뷔를 하고 교수님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너답지 않게 밖에선 어쩜 그리 까부는 역할만 하냐”고 신기해하실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트렌드가 로맨틱코미디, 그리고 캔디형 여자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늑대의 유혹> 정한경 이후 6~7년간 줄곧 밝은 역할만 맡았다.

- 특유의 낮고 그윽한 목소리의 진가를 30대 이후부터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 타고나길 음색이 낮고 안으로 들어가는 목소리다. 그런데 20대 때 현장에 나가면 언제나 ‘너무 진지하다, 우울해 보인다’는 피드백을 곧잘 들었다.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디렉션이 ‘톤 좀 높여줘’인 경우도 허다했다. 기자회견할 때 좀더 밝고 귀엽게 톤을 높여서 말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그러니 나로서는 '잘'하기 위해 하이톤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열심히 고음 내는 법을 연습했고 현장에선 있는 힘을 다해 까불고 놀면서 발랄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방전돼서 쓰러져 자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 외부의 요구와 내부의 자질이 어긋났던 그 시기를 지금 돌아볼 때, 이청아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 연기력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았기에 복합적인 이유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23살 때 건강이 한번 훅 무너졌었다. 25살 때 소속사 계약 갱신을 할 시점이 왔는데 배우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근본적인 고민부터 찾아왔다. 내가 보는 나와 소비되는 나의 차이가 너무 커서 학교로 더 숨어들었다. 데뷔 이전의 나를 알던 사람들은 스크린 속 이청아에 어색함을 느끼고, 배우 이청아를 먼저 접하고 입학한 후배들은 실제 나를 보고 의외라고 했다. 연기 전공이 아니라 연출 전공인 내게 왜 배우가 연출을 공부하냐고 보는 시선도 있었고 누구는 내게 배우보다는 액팅 코치가 더 맞겠다고 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가장 잘하고 못하는 게 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종잡기 힘든 게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오히려 단련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때는 ‘여기까지만 하고 관둔 배우로 기억될 수는 없겠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대중의 평가를 받아보고 그때 미련 없이 관두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사람이 신기한 게, 한번 마음먹고 나면 한결 수월하게 여러 시도들을 하게 된다.

- ‘한번 잘해내면 다음엔 더 잘해낼 거야’가 아니라 ‘어떻게든 한번 잘해낼 때까지만 해보고 관두겠다’라!

= 패배자의 마음이지. 기준치가 높은 사람인데 정작 나 자신이 거기에 못 미친다는 걸 아니까. 외로웠던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배우의 일을 특별하게 말하고 싶진 않다. 학생, 직장인, 주부 할 것 없이 다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을까? 누구나 자기 삶에서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자기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은 모두가 동일한데 그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나의 이런저런 부족함에 대해 동생에게 토로하다가 한마디 조언을 듣고는 머리가 띵해졌다. “누나가 남들한테 힘 주는 만큼 자신에게도 딱 한번만 힘 줄 생각을 해봤음 좋겠어.” 그러니까 셀프 페널티를 주란 말이었다. 그때부터는 가끔 나를 남처럼 지켜보곤 한다. 그제야 <위플래쉬> 교수님이 되어 스스로를 다그치는 내가 보이더라. 내가 플레처(J. K. 시먼스)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웃음)

- 대화할수록 자기 자신을 대하는 엄격함, 혹은 절제력 같은 것을 느낀다.

= 배우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감사하게 느끼는 건 이 일이 내 안의 냉소를 어떻게든 깎아내 다정하게 만들어준다는 거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에게 관대하지가 못했다. 동물들과는 친밀한데 사람은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배역을 만날 때도 타인과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인물을 연기할 때 굉장히 편안함을 느낀다. 쉽게 말해 내가 아는 이야기인거지.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다. 내 역할로서 그 인물들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사람을 이만큼 이해하고 공부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그저 깊이 파고들고 조용한 걸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내가 20대 때 연기한 발랄한 역할들을 관객으로선 즐기며 보질 못하는 편이다. 내게 주어진 역할로서 성실히 임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그렇게 친근함을 느끼거나 이입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거다.

- 삶을 통찰하는 연극이나 소설을 일찍부터 접해서 오히려 더 그랬던 건 아닐까?

= 전부 글로만 배우고 글 속에서만 해본 것 같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골목대장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성격이 확 바뀌어 말이 없어지고 때때로 가라앉아서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다. 지금도 단체 생활에 되게 취약한 편이다. 그래서 학교 연극 워크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영화를 연출할래도 단체생활이 필수이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소규모로 꾸릴 수는 구조니까.

- 듣다 보니 다행스럽고 아름다운 건, 배우라는 직업이 나다움과 불화하는 아픔도 줬지만 동시에 나를 더 넓은 인간으로 깨부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2009) 때 중요한 경험을 했다. 황정민 선배님 연기를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어서 무조건 하겠다고 한 드라마이고 반응도 좋아서 행복했던 작품이다. 그것과 별개로 내 캐릭터인 구민지에 적응하는 과정은 꽤 힘들었다.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 애였다. 처음엔 어떻게 이렇게 사는지,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건 아닌지 힘들어하다가 어느 순간 이 아이의 마음이 내게 자연스럽게 스미더라. 대화의 공백이 생기거나 상대가 어색해하는 것 같으면 그 불편함을 자기가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민지는 그저 자기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늘 행복했으면 좋겠고, 남의 웃음이 좋은 애였던 거다. 그걸 이해할 무렵 실제 내 삶에서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인간관계가 있다. 배우 일은 부족한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인간의 면면들을 하나씩 이해하고 수집하게 해 준다.

- 인간 이청아는 언제 소박한 행복이나 자유를 느끼나.

=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들어가기 전 휴식기를 가지면서 잠시 여행을 다녔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요리하다가 생크림이 부족해서 그냥 씻지도 않은 채로 잠옷 입고 낯선 도시의 슈퍼로 뛰쳐나갔다. 불만 꺼놓고 우다다다 뛰어갔다 오는 순간에 ‘왜 내가 그동안 이런 순간을 더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행복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아직 식지 않은 따끈따끈한 요리를 완성했지. 그런 시간들이 나를 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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