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사고 싶은 물건에 마침 할인 가격이 매겨진다거나, 이직하고 싶을 때 알맞은 제안을 받는다거나, 복잡한 이사 일정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때 같은 것 말이다. 그런 행운을 맞이하면 그 물건이나 직장, 집이 왠지 더 좋아진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때’는 초등학교 5학년 때다. 평생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책 두권을 연달아 만났다. <어린 왕자>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이다.
사막에서 길을 헤매는 전투기 조종사가 이상한 어린이를 만나 꿈같은 이야기를 듣는 <어린 왕자>에는 상상과 은유가 가득하다.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제제가 뽀르뚜까 아저씨를 만나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는 현실의 참혹함과 아름다움이 자극적일 만큼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린 나는 줄거리만 따라갔을 뿐, 더 깊은 의미나 주제를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두 작품을 읽고 몸을 떨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슬픔에도 스펙트럼이 있다면 나는 양 끝을 경험한 셈이다. 갑자기 내가 알던 세상이 폭발하듯 커지는 바람에, 그것도 슬픔으로 커지는 바람에 정신이 얼얼했다. 그 뒤로 책에 푹 빠졌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스스로 ‘책을 아는 사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독서교실 어린이들한테 “어렸을 때 제일 좋아했던 책”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이 두권을 말했더니 어린이들은 “그중에 딱 한권만 고른다면요?” “그래도 억지로 고른다면요?” 하고 집요하게 물어댔다. 사실 이건 내가 어린이들에게 ‘이 책이 저 책보다 왜 좋은지’ 설명하게 하느라 자주 하는 질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그 질문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고심 끝에 <어린 왕자>라고 답했다. 그림도 예쁘고 등장인물도 개성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두 작품 모두 절정에서 누군가 죽는다. 어린 왕자는 꽃이 있는 별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육신을 버리기로 했고, 뽀르뚜까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한쪽은 어린이가 죽고, 한쪽은 어른이 죽는다. 내가 어린이가 죽는 이야기를 더 좋아해왔다는 건 좀 충격적이었다. 물론 <어린 왕자>가 우화적인 이야기다 보니 죽음이 미화된 것도 있다. 그래도 주인공이 죽었는데!내가 <어린 왕자>를 더 좋아하는 이유로 찾아낸 한 가지는 이렇다. 이별의 슬픔을 누가 감당하느냐의 문제라는 것.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는 어린이인데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서는 언제나 어른이 훨씬 더 많은 짐을 들어야 한다. 이야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을 모두 ‘내 인생을 바꿔놓은 책’으로 꼽으면서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어린 왕자>만큼 여러 번 읽지 않았던 게 내게도 설명이 되었다.
딱 맞게 만난 주인공들도 이별을 맞이한다. 그때의 슬픔은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책을 덮은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반복한다. 슬픔은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굳센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한줌 더 가져가야 한다. 그것이 좋은 이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