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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엘새서의 <디지털 시대의 영화>
2002-06-14

어제로 돌아가 내일을 말하다

저명한 영화학자 토마스 엘새서가 편집한 <디지털 시대의 영화>의 원제는 <영화의 미래>(Cinema Futures)이고, 그뒤에는 ‘카인, 아벨 또는 케이블?’(Cain, Abel or Cable?)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엘새서에 따르면 성경에 나오는 반목하는 형제 카인과 아벨은 각각 텔레비전과 영화를, 그리고 케이블은 이 두 미디어가 뉴미디어로서 맞이하게 될 변형 혹은 재형성화를 가리킨다. 이쯤만 말해도 이 책이 과연 무엇을 그 주요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부제 뒤에 붙은 물음표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케이블’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단정적인 논의를 펼치는 책이라기보다는 그 관계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는 비유 자체에 대해 조심스럽게 사려 깊은 의혹을 던지는 책이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세를 얻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미디어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려 했다. <디지털 시대의 영화>의 편집자인 엘새서는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예단된 미래로 곧장 나아가려는 성급함을 반대한다. 편집자의 그런 진중함이 아마도 이 책의 첫째 미덕일 듯싶다. “그래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해 논의하면서, 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평가하기 위한 척도를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 역사적인 전망이 필요한다고 생각한다”는 문구를 서론에서 인용했듯이, 엘새서는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역사를 경유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그는 ‘디지털 시대의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이 책에서 이른바 영화의 ‘기원’이라고 불리는 지점으로, 즉 루이 뤼미에르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뤼미에르를 우리가 흔히 가정하게 되는 어떤 유의 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그가 실재했던 역사 속에 존재하게 하려고 고투한다. 엘새서는 뤼미에르를 영화적 리얼리즘의 대부가 아니라 오히려 가상성(virtuality)의 선조와 산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른바 미디어의 고고학을 흥미롭게 펼쳐놓는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라는 앨세서의 글은 그 과거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현재에 대한 사고와 만나는가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디지털이 현재의 영화와 텔레비전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요점을 단 그의 또 다른 글 역시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

엘새서 같은 영화학자들 외에 저널리스트, 작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활동분야에 속해 있고 또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필자로 참여한 책이니만큼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사실 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결론이 명백한 어느 하나의 길로 인도해주진 않는다. 그래도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속한 글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들 모두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