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미래를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 실은 거의 매번 그렇다. 그러나 미래를 아는 게 딱히 좋을 게 없는 경우가 많고, 애초에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가끔만 그러는 정도로 타협하기로 했다.
방송을 녹화해야 할 때나, 지금처럼 출판용 글을 써야 할 때, 즉 발화 시점과 수용 시점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을 때, 그렇다. 특히 그사이 어디에선가 중요한 사건이 도사리고 있을 경우에 더욱 그렇다.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걸 잔뜩 쏟아놓았는데, 그 글이 출판되어 읽히거나 그 방송이 화면으로 나가는 시점에 엄청난 재난으로 온 사회가 침울한 상황에 빠져 있다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를 살며 각자의 ‘입장’에서 그걸 받아들인다.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내가 ‘그때’ 왜 그랬고, 어떤 ‘생각’이었는지를 따져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밝혀둔다. 이 글은 4·10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에 쓰였다. 소위 ‘판세’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있고, 자칭 타칭 전문가들의 분석과 ‘예측’이 넘쳐나며, 그리 짧지만은 않은 세월을 겪어온 경험칙과 ‘감’이라는 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은 실제 사건이라는 견고한 벽에 부딪혀 무참히 깨질 예언이라는 이름의 달걀에 불과하다. 개중 일부가 살아남아 ‘문어’로 부화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작해야 그 문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에 세워질 견고한 벽 앞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며 깨질 또 다른 달걀을 던지는 일일 뿐이다. 문어에게는 발이 참 많아서 한번에 (서로 다른 크기를 가진 달걀을) 여러 개도 던질 수 있다.
나는 돗자리를 깔아 예언을 팔아먹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문어가 될 생각은 없다. 이 글 역시 ‘그거 봐! 내 말이 맞았잖아!’라고 호들갑을 떨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서, 이렇게 해도 맞고 저렇게 해도 맞을 ‘자기충족적 예언’ 따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만 혹시라도 이번 총선이 끝나고 나면, 다시 정치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평온함이 찾아오리라 기대한다면 오산일 거라고는 말해두고 싶다. 거센 민심이 어느 한쪽의 손을 확실히 들어주건, 여러 해석과 행위의 여지를 남기는 모호한 결말이 되건, 여의도와 용산 사이에서 벌어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막을 내릴 리는 만무하다.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그리고 다시 공성전으로 바뀔 수는 있겠지만 이미 우리 정치는 ‘상시적 전쟁’ 국면으로 깊숙이 접어든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 굳이 ‘혼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마치 혼란하지 않게 정돈된 정치가 우리 현대사에 있었기나 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천상의 평론가나 저널리스트가 너무 많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그건 혼란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정치가 없었던 시절에 대한 그릇된 기억일 테다. 모쪼록 지나치게 환호하거나 과하게 절망하거나, 하염없이 피곤해하지만은 않길 바랄 뿐이다. 한쪽에서는 밭을 갈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기를 벼리는 삶, 낮에는 생활인이었다가 밤에는 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정치. 어쩌면 그게 이 시대 우리 정치의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되었음을, 당분간 우리의 시민됨의 표징일 수밖에 없음을 담담히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