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영화 같다. 낭만적으로 들릴 법한 이 말이 요즘은 피로로 다가온다. 요즘 장르가 대체로 디스토피아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두 대상을 이어 붙이고 싶을 때 비유법으로 다리를 놓는다. 다리를 잇는 요령은 대상에서 유사한 속성 한 가지를 추출하는 데 있다. 예컨대 ‘눈은 마음의 창’이란 표현엔 ‘본다’는 속성을 매개로 눈동자와 창문, 물리적으로 동떨어진 두 세계를 잇는다.
‘영화 같다’는 표현의 다리로 잇고자 하는 건 결국 현실이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흔히 ‘영화 같다’고 경탄한다. 여기서 현실과 영화를 잇는 매개는 대중의 욕망이다. 집단의식, 시대정신,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때로 사람들은 영화를 경유하여 각자의 현실을 마주한다. 재밌는 건 이 반응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두 갈래로 갈라진다는 거다. 하나는 소망을 담은 길. 실현되기 힘들지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상적인 상황을 꿈꾼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의 길.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빚어낸 악몽이다.
현실과 영화를 잇는 다리는 재료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너무 멀어지면 허무맹랑함에 실감하기 힘들고, 반대로 가까우면 관찰 카메라 같은 무미건조함에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있을 법한데 신기한, 혹은 희한한데 말은 될 때 비로소 ‘영화 같은’ 쾌감이 발생하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부쩍 ‘영화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상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보다 더 황당하고 말이 안되는 뉴스를 매일 접하다 보니 ‘이러니 <개그콘서트>가 망하지’라는 푸념도 이해가 된다.
2024년 대한민국의 스크린 밖에서는 상상된 이야기보다 과장되고, 터무니없고, 상식 밖의 일들이 태연하게 자행 중이다. 화면 너머 뉴스로 보면 흥미진진할 지경이지만 남의 일이 아니라 웃을 수가 없다. 불났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더니 그게 우리 집인 상황. 달리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진짜 현실의 민낯 같다. 현실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건 학습된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이란 애초에 통제 불가능하고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혼돈의 연속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영화(로 대표되는 상상력)가 중요하다. 어쩌면 영화야말로 실타래처럼 엉킨 현실을 ‘말이 되게’,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하여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때론 영화라는 창을 통해 현실을 바라볼 때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현실을 살면서 각기 다른 영화를 관람 중이다. 2024년 대한민국은 디스토피아에서 호러, 재난물,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로 기억될 법하다. 4년에 한번, 새로운 영화표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자가 ‘영화 같은’ 현실을 만드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다름 아닌 투표다. 영화와 현실을 잇는 매개가 ‘본다’가 아니라 ‘한다’가 될 때 막막한 현실이 영화처럼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 영화가 사이다 같은 히어로물이 될지, 또다시 디스토피아 속편이 될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