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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980’, 덤덤해야 할 역사의 비명을 미원 범벅의 간짜장처럼 담는다
최현수 2024-03-27

1980년 5월17일 광주 전남도청 뒷골목은 화평반점이라는 중식당의 개업 잔치로 시끌벅적하다. 일평생 남의 가게 주방장으로 살아온 아버지(강신일)가 드디어 자기 손으로 가게를 연 경삿날이기 때문이다. 맏며느리인 철수 엄마(김규리)는 만삭의 몸으로 홀 서빙을 돕고 결혼을 앞둔 삼촌(백성현)은 예비 신부와 인사를 드리러 온다. 온 동네 이웃들이 모여 축하를 건넨 화평반점의 첫날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손주 철수(송민재)는 목욕탕에 들러 세신까지 하면서 본격적인 첫 장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줄 알았던 철수네 가족의 기대와 달리 광주의 거리는 온통 계엄군과 최루탄으로 가득 찼다. 거리는 계엄령으로 봉쇄되고 무장한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이었던 장남 철수 아빠(이정우)는 계엄군에 쫓겨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충무로에서 30년간 미술감독으로 지냈던 강승용 감독의 연출 데뷔작 <1980>은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오월의 광주를 소시민의 시선에서 그린다. 영화는 군부 쿠데타에 항거한 데모의 행렬이나 계엄군의 포격에 맞서 시민군이 저항하는 현장을 쫓지 않는다. 대신 세 글자의 본명보단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삼촌과 이모라고 불린 이웃사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는 결혼과 출산, 개업과 성공이란 꿈을 지녔던 보편의 삶들을 폭도와 괴뢰로 매도했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반격하는 영화의 일격이며,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참극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1980>은 오월의 광주를 마주하여 역사의 비명을 침착하게 기록하는 데 실패한다. 철수네 가족을 덮친 학살의 참상은 그저 상투적인 대사와 편리한 설정들로 대체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둘러싼 민족의 슬픔과 분노를 간편한 오열로 함축시킨 영화는 오히려 비극의 목소리를 잡음으로 만들고 만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훌륭한 간짜장과 달리, <1980>은 너무 많은 조미료를 쏟아부어 역사라는 가장 중요한 재료를 가려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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