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는 영화의 의도적 성취와 무관하게 동시대 영화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아날로그적 감각을 소환한다. 멀티버스를 통한 부활을 종용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려는 영원주의의 강박은 영화의 생애주기를 무한에 가까이 연장하면서 영화산업을 언제나 젊은 것으로 가장하려 할 뿐 아니라 화면에 출현하는 죽음마저도 불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반대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불교의 메타포에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관계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가능세계를 뒤에 두고 빠져나온다. 이러한 순응의 태도를 아날로그적 감각의 (재)출현이라 부를 수 있을까.비슷한 맥락에서 겹쳐보고 싶은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심도>다. <심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떠날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은 결국 엇갈린다. 한 사람은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다른 사람은 건너편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남자가 그의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자동차는 사라져버린다.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이 수없이 떠올리고 지워냈을 가능세계(들)가 여기서도 진동하고 있다. <심도>가 사진적 욕망을 통해 가능세계의 엇갈림을 물성화하려 시도한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바로 그러한 비가역적 운명의 경계들을 정서적으로 표면화하려 한다. 두 가지는 모두 아날로그적인 방식이다. 아날로그란 매 순간 물성화의 충동과 함께 작동하며, 취소와 말소의 움직임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패스트 라이브즈>는 대안적 미래를 향해 건너뛰거나 현실을 상쇄하지 않으면서 바로 그러한 비가역적 움직임이 드러내는 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아날로그적이다. ‘돌이킬 수 없음’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
그러나 동시대 영화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아날로그적 감각을 불러들이려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한 순간에 영화에서는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두 영화의 연인이 모두 실패하는 결말로 치닫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심도>에서 자동차가 카메라의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나버리는 장면이 아날로그의 불가능성에 대한 디지털적 불안의 징후를 내보인다면, <패스트 라이브즈>의 아날로그적 정서는 이민자 정체성의 문제로 희석되면서 아날로그 자체에 대한 사유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우리는 아날로그를 그 자체로 포착할 수 없는데, 아날로그는 디지털이라는 속성과의 비교로만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발된 연인의 이야기에 내재된 불안의 본질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다는 감각을 과거의 유산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변화에 관한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아날로그는 사후적으로 발명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영화가 표방하는 아날로그의 소급적 시간성이 로맨스를 경유해 이민자 서사와 맞닿는 효과에 대해 주목하려 한다.
금기 없는 밀회
<패스트 라이브즈>의 로맨스는 일탈 같은 만남을 다룬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린의 <밀회>와 엮여 회자되지만 거짓말과 위장으로 금기를 자극하는 <밀회>와 달리 금기의 기운이 거의 희박하다.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나영과 아서(존 마가로) 부부의 대화가 해성과 나영의 만남을 정당화해주고 있으며, ‘몰래’라는 감각이 부부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밀회의 로맨스가 금기의 긴장을 형성하려면 둘만의 공간이 필수적이다. 그 공간은 두 사람이 만든 일시적 평화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만 성립하기에 은밀하다. 그러나 해성과 나영은 철저히 공적인 장소를 배회한다. 두 사람은 크루즈를 타고, 공원을 산책하고, 관광지를 거닌다. 오히려 밀회의 공간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은 두 사람이 쓰는 언어다. 정확히는 뉴욕이라는 도시 환경과 불화하는 언어의 이질성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묶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그 언어를 형성하고 있는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한국어는 밀회의 관념적 공간에 한없이 가까워지려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를 확인하는 기호의 외면적 유사성에 그친다.
금지된 로맨스의 긴장이 강화되는 또 다른 순간은 제3자가 개입했을 때다. <밀회>에서 이별을 앞둔 두 남녀의 애틋한 시간을 망쳐버리는 친구의 등장을 떠올려보자. 친구의 무례함에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관계의 비밀스러운 속성을 강조한다. 반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과 나영, 아서라는 세 사람의 구도는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을 키우기보다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에 놓인 나영의 심리를 한가운데에 둔다. 물론 세 사람의 조합이 다소 불편한 긴장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관계가 탄로 날 수 있다는 종류의 서스펜스는 아니다.
결국 <패스트 라이브즈>의 로맨스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사건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손이 거의 닿을 듯한 클로즈업숏을 보여주지만, 이는 사건의 인과로 연결되는 구체적인 행위이기보다는 화면을 ‘간질거리는’(김신 평론가) 정서를 대표하는 대문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금기의 감각은 두 사람 사이에서 출현하기보다 관객의 내재된 반동으로 추동된다. 금기라는 테마를 직접 건들거나 어떤 사건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 관객을 내적으로 연루시키는 로맨스의 금욕적 정서가 이 영화의 영리함일 것이다. 이러한 정서가 내포하는 비접촉적 단절들은 전생과 후생의 간극을 포함해, 국적과 정체성의 관계와 같은 한 사람의 생애주기에 포함된 불가능성의 감각과 로맨스를 연결 짓는 충동을 부단히 자극하고 있다.
전생과 더불어 사는 시간
발길을 들이지 못한 모든 운명의 가능태가 전생(들)이라는 영화의 간접적 설명에 의하면, 나영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내다보고 움켜쥐려는 사람이다. 나영은 그녀의 손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가능세계의 과거를 모두 현실화할 수 없다는 시제의 불가능성에 가로막힌다. 이처럼 그녀의 시간성이 세계와 불화하고 있는 것은 일정 부분 그녀의 이민자 정체성과 완전히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 걸쳐 이민자로서의 나영의 성장은 줄곧 의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험에서 졌다고 눈물을 보이거나 동생의 영어 이름을 뺏으려 하는 것, 극작가로서 국제적인 상을 타겠다는 포부,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부지런한 욕심. 나영은 모든 것을 동시에 거머쥐려 한다. 이것은 나영이라는 특정한 개인의 성격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민자 정체성이라는 이중 국적으로 사는 감각에 대한 총체적인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생의 흐릿한 기억처럼 남아 있는 고국에서의 삶과 그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욕심은 이들의 생존 전략이자 삶에서 좀처럼 떨쳐낼 수 없는 복수의 중첩된 문화적 감각에 대한 비유처럼 기능한다. 적어도 나영의 관점에서 이 불발된 로맨스는 이민자 정체성의 감각과 그 총체에 대한 낭만적 대가다.
이민자 정체성의 시간 감각을 형상화하는 것이 영화의 아날로그적 감각을 복원하는 시도와 연결된다는 가능성은 상당히 징후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가 국제적 무대에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 자체보다도 이 영화가 인연이라는 테마를 동양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성취로만 인용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떠오른 영원에 대한 가설은, 영원이란 죽거나 늙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화될 수 없는 사실들을 픽션에 두고 나오는 일이라는 것. 픽션은 그런 장소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