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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소녀 사랑기 <판타스틱 소녀백서>
2002-06-14

<판타스틱 소녀백서>(2001, 원제 고스트 월드)는 95년 다큐멘터리 〈크럼〉으로 선댄스영화제 대상을 받았던 미국의 테리 지고프 감독이 언더그라운드 만화 〈고스트 월드〉의 작가 대니얼 클라우즈와 함께 각색해 만든 작품이다. 제작에 ‘할리우드의 괴짜’ 존 말코비치까지 합류하며 비주류의 감성을 맘껏 과시한 〈판타스틱…〉은 여학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과 괴성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할리우드 10대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된다. ‘모든 아픔을 견뎌내고 어른이 된다’는 식의 성장영화의 도식도 찾아볼 수 없다. 지고프와 클라우즈는 독특한 감성의 10대영화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아웃사이더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고민 끝! 성인으로서의 새삶이 펼쳐진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스칼렛 조핸슨)에겐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속물처럼 보이고 세상사 모두 심드렁한 이들에게 졸업은 단 몇시간의 환각제일 뿐이다. 대학에도, 취직에도 아무런 계획이 없다. 이니드는 미술과목 과락으로 여름학기까지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 무안주기, 광고 읽고 장난전화하기, 뻔뻔스런 성 농담하기…. 언뜻 엽기적이고 괴짜처럼 보이는 이니드와 레베카는, ‘유령 같은’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주류로 살아가기엔 불행히도(!) 이들은 너무나 똑똑하고 너무나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특히 이니드에겐 하룻밤만 지나면 쇼핑몰과 커피숍이 하나씩 들어차고, 사람들의 관계는 1차원적인 이 현실이 진저리 날 뿐이다. 아빠는 딸을 사랑하는 듯하지만, 도대체 딸의 고민이 뭔지 모르는 평범한 중년이다. 여름학기 미술선생은 이니드의 재능은 알아보지 못한 채, 작품이 되든 안되든 뭐든지 ‘의미’만 갖다 붙이면 예술이라 생각하는 의미지상주의자다. 이런 이니드 앞에 낮에는 평범한 회사직원이지만, 밤에는 재즈와 블루스 레코드, 옛날 광고포스터 수집이 취미인 40대 남자 세무어(스티븐 부세미)가 나타난다. 남들과 어울리기 꺼리고 또 그런 자기자신을 경멸하는 세무어에게 이니드는 진정으로 애정을 느낀다. 그것은 사랑보다도 진한 동질감이다. 인종차별, 속물주의, 근엄주의, 물질주의 … 이런 현대 사회에 대한 온갖 풍자와 비판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영화는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조숙하고 시니컬하면서도 어느 순간 10대임을 숨기지 못하는 이 맹랑한 소녀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니드가 대책없는 세상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영화의 엔딩은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도라 버치와 스티븐 부세미뿐 아니라 모든 출연인물들이 보여준 인상적인 연기, 그 자신 희귀한 78회전 레코드를 1500장이나 갖고 있다는 지고프 감독의 취향이 물씬 반영된 블루스곡들로 가득 찬 사운드트랙과 세심한 세트, 의상들도 영화를 빛나게 한다. 21일 개봉. 김영희 기자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