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자인 지인과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이름은 ‘이과 여자’. 제목에 ‘문과 남자’가 들어가는 과학책도 있다는데 이과 여자 둘이 ‘이과 여자’ 이름으로 못할 것 없지 싶었다. 기획 회의 후 지인은 팟캐스트 로고로 써보면 어떻겠느냐며 핑크 베이지색으로 그려진 짧은 단발머리 여자의 얼굴 이미지를 보내왔다. 인공지능이 생성해준 이미지라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 유료 이용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의 첫 요청은 “이과 여자”를 표현하는 로고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뒷머리를 동그랗게 묶은 여자의 옆얼굴 주위로 막대그래프, 원자구조. 여성 성별 기호 등이 원형으로 배치된 이미지였다. 비교를 위해 “이과 남자”도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과 남자는 다부진 표정으로 정면을 보는 남성의 얼굴이었는데 넥타이를 매고 각진 모자를 쓰고 있어 군인 장교처럼 보였다. 배경에는 원자구조와 톱니바퀴, 시험관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여자와 남자를 한번씩 해보고 나니 “이과 사람”은 어떻게 그릴지 궁금해졌다. 알록달록한 단발머리를 한 얼굴이 달린 커다란 여성 성별 기호가 중심에 있고 그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남성 성별 기호 두개가 흩어져 있는 형상이 생성됐다. 따로 요청한 적이 없음에도 인공지능은 “성중립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 이미지가 성중립적이기보다는 여성적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과 여자’를 다시 그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여성적인 요소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디자인했다며 긴 머리에 치마를 입은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것이 분명했다.
‘여성스럽지 않게’라는 부정형 표현이나 ‘성중립적으로’라는 추상적인 용어보다 구체적인 지시어가 필요해 보였다. “짧은 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은 이과 여자”라고 쓰면 어떨까? 바지를 입은 긴 웨이브 단발의 여성이 등장했다. 팟캐스트에 쓸 만한 로고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긴 머리를 하고 치마를 입은 이과 남자”를 그려달라고 해보았다. 각진 턱에 수염을 기르고 짧은 치마를 입은 긴 머리의 남성 이미지가 생성됐다. 흥미로운 점은 앞선 여자 이미지 생성에서는 없던 “전통적인 성별 규범에 도전하고 과학 기술 공학 수학(STEM) 분야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표현”했다는 설명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내친 김에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중립적인 이과 남자와 이과 여자의 모습”을 부탁했다. 실망스럽게도 화장실의 남녀 표시 같은 그림이 나왔다. 놀라운 것은 구체적으로 지시를 해도 이과 여자의 머리 스타일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머리가 짧은 이과 여자와 이과 남자” 이미지에서 여자의 머리는 동글동글한 단발이었고 “머리 길이가 똑같은 이과 여자와 이과 남자” 이미지에서는 여자의 머리가 오히려 더 길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궁리 끝에 “쇼트커트 이과 여자”라고 하자 그제야 시원하게 목이 드러난 커트 머리의 여성 이미지가 생성됐다! (사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쇼트커트 이과 여자’를 이과 남자와 함께 그려달라고 하자 쇼트커트는 짧은 단발로 다시 길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과 여자’라는 팟캐스트 진행자로서 적절한 별명을 지어달라는 부탁에 이 인공지능이 ‘퀀텀 퀸’(Quantum Queen)을 제안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양자 여왕’이라니, 내가 인공지능한테 뭘 기대했던가 싶어 바로 노트북을 덮었었지. 결국 로고 생성에도 실패했지만 작은 교훈을 얻어 여기 기록에 남긴다.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콘텐츠가 성별 규범이나 고정관념을 답습하지 않게 하려면 집요한 의지와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하다고. 내가 더 집요하게 더 구체적으로 지시했다면 퀀텀 퀸 대신 어떤 이름을 얻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