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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좋은 타이밍, <황야> 이희준
이우빈 2024-02-01

양기수(이희준)는 남산(마동석)과 함께 <황야>를 지탱하는 커다란 축이다. 영화의 초반부를 책임지는 인물이며 웅크려 있던 남산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고 나오기도 한다. 커다란 비밀을 지닌 채 모종의 실험을 진행 중인 그에겐 “인류를 지키겠다”라는 확고한 목적의식이 있다. 남산 무리와의 상호작용을 제외하고서라도 <황야>의 일부를 뚜렷하게 구성하는 독립적인 캐릭터로 생동하는 것이다. 그 생동의 원천은 늘 그랬듯 캐릭터가 “설 땅”을 다지는 이희준 배우의 연기 메커니즘이었다. 허명행 감독과의 적극적인 논의를 통해 캐릭터의 깊이와 넓이를 모두 챙겼다. 그 끝에 양기수는 단순히 미친 의사,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아이러니를 듬뿍 지닌 복합적 인물이 됐다.

- 양기수 캐릭터는 비밀스러운 전사를 지닌 복합적인 인물이면서 딸을 살리려는 마음 하나로 돌진하는 직선적 캐릭터 같기도 하다. <남산의 부장들> 인터뷰 때 “지금까지의 캐릭터는 대사의 행간이나 서브 텍스트를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곽상천 캐릭터는 아주 직선적으로 심플하게 연기”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양기수는 둘 중 어느 쪽이었나.

= 아이러니한 인물이어야 재밌을 것 같았다. 양기수에겐 딸을 살리려는 목적도 있고, 자신의 기술을 사용해 폐허에 선 인류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단 생각도 가지고 있다. 다소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거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야 한단 의식이 확실히 자리 잡힌 인물이다.

- 양기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느낀 것인지.

= 양기수라고 왜 양심의 가책이 없었겠나. 아지트에 도착하기 전 몇년 동안 혼자 폐허 속을 돌아다니면서 인류의 나쁜 모습이란 모습은 다 겪었을 거다. 잔인하고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수없이 만났을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 인간이 멸종할 것 같단 확신이 들 수밖에 없었을 상황이다. 자신의 실험이 정말 딸을 위한 것이고, 딸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란 생각을 자연스레 기저에 깔게 됐을 것 같다.

- 아지트 주민들을 관리하는 리더이기도 하다. 실험할 때의 본모습과 달리 무척 친근한 태도로 그들을 이끈다.

= 아지트의 관리는 결국 실험의 성공이란 큰 목표를 위해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상 업무다. 잘 굴러가도록 두기만 하면 된다. 아침에 조회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매일매일 반복하는 일로 대하는 정도다.

- 양기수는 조금 허술한 악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세우나 때론 무척 충동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황을 어그러뜨리기도 한다.

= 허술하다기보단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중에 부하들이 문을 두드리거나 방해할 때 특히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다. 실험의 가치를 워낙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주위 사람들이 몰라주니 답답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론 ‘남산 무리도 양기수의 목적을 한번쯤 제대로 물어봐주고 대화를 나눴으면 어땠을까’라며 상상하기도 했다. (웃음)

- 때론 궁색해 보일 정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 어떤 부분에서 양기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표현하려 했는지.

= 곱슬머리. (웃음) 저런 시국에 파마는 못했을 테니 길러보니까 곱슬머리였을 거다. 그런 부분에 어떤 인간미가 좀 있지 않나. 외모를 정하는 과정에 여러 대안이 많았다. 머리를 짧게 하거나 아예 머리카락을 다 민 느낌도 있었다. 결국엔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정해졌고 처음 아지트에 나타났을 땐 묶은 긴 머리에 깨진 안경까지 가미했다.

- 캐릭터의 개발 과정에서 허명행 감독과는 이야기를 자주 나눈 편인가.

= 정말 많이 했다. 처음 영화 제안이 왔을 땐 사실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워낙 심플하게 흐르는 액션영화인데 캐릭터가 공중에 뜨면 연기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에게도 양기수란 캐릭터가 딛고 설 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감독님이 양기수에게 어떤 것이 필요할지 논의를 건네줬고 함께 캐릭터를 보완해나갔다. 예를 들면 양기수가 딸과 중얼중얼 대화하는 장면도 감독님과의 논의에서 나온 것이고, 결말 부분 양기수의 모습도 회의를 통해서 내가 제안한 내용이었다.

- 그간의 필모그래피에서도 <황야>는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 맞다. 액션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거의 없어서 아쉽긴 하다. (웃음) 그래도 감독님, 배우들과 영화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있어서 정말 즐거웠다.

- “인물이 거울을 보며 가장 두려워할 것, 가장 싫어할 것”을 찾는 게 연기 비법이라고 밝힌 적 있다. 양기수가 실제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했나.

= 양기수에겐 자신이 믿고 추진해온 계획이 망가지거나 틀렸다고 여겨지는 게 가장 두렵지 않았을까. 혹은 딸이 “아빠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는 걸 상상하는 게 가장 무섭지 않았을까 싶다.

- 공학을 전공해서인지 일상의 문제도 모두 원인을 찾고, 연기에 임할 때도 캐릭터의 논리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양기수와 다소 비슷한 느낌도 있는데.

= 어릴 때 했던 인터뷰고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촬영 전에 10가지의 버전을 혼자 준비해갔다면 지금은 사고방식을 훨씬 넓게 열었다. 모범생, 우등생에서 이제는 좀더 가볍고 즐거운 학생이 되려는 중이다. 상대 배우의 연기와 현장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최대한 유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렇게 좋은 타이밍과 상황, 연기가 우연히 겹쳐서 최고의 한컷이 나오는 것 같다.

- <황야> 속 양기수에 관한 최고의 한컷을 꼽자면.

=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은 양기수가 딸에게 약물을 투여할 때인 것 같다. 5초 만에 후루룩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양기수의 마음이나 성격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 <병훈의 하루>에 이어 2번째 연출작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 단편영화고 한 장소에서 가족들의 술자리 난동, 수다가 오가는 소동극을 그린다. <병훈의 하루>에 이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박병규 촬영감독과 함께한다. 이번에도 내가 너무 보고 싶고 재밌을 것 같은데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은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 온 가족이 연기 앙상블을 주고받는 연출이 중요해서 직접 연기를 하진 않기로 했다. 대신 극단 ‘간다’에서 오랫동안 함께해온 진선규, 오의식 배우 등이 출연한다. 제목은 <직사각형, 삼각형>으로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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