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은 지략과 전술로 왜군에 승리한다. 그러나 역사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이순신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이었으며 치밀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일은 영화 바깥의 관객이 해야 할 몫이다. 하여 자세히 알고 보면 더 감탄스러운 <노량: 죽음의 바다> 속 이순신의 전략을 풀이했다.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을 쓰는 등 이순신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 소장의 탄탄한 자문과 제장명 교수의 논문 ‘露粱海戰과 이순신 戰死 狀況에 관한 고찰’(2011)을 참고·인용했다. <선묘증흥지> <행장> <난중잡록> <은봉전서> <충무공유사> 등 수많은 서적에 기반한 노승석 소장의 해석은 “노량해전에 이순신의 리더십, 회유력, 의지, 애민정신, 전투력”이 총망라되어 있단 말로 정리된다
야밤의 관음포 내선 작전
노량해전이 일어났던 11월19일 새벽녘의 군사 상황도. 관음포에 갇힌 왜군이 조명연합군에 공격받고 있다.
전쟁의 승패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왜군의 뇌물을 받은 진린은 1598년 11월14일 일본의 연락선 1척이 조명연합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도록 둔다. 그리고 11월17일 이순신은 노량 근처에 밝혀진 왜군의 횃불을 발견했다. 경남 사천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순천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에 호응한 것이다. 이순신은 “왜선이 나간 지 4일이 되었으니 구원병이 반드시 올 것. 묘도 등지로 가서 차단해야 한다”(<선조실록>)라며 야밤에 신속히 기동하여 포위 태세를 가하는 내선 작전을 계획했다. 이후의 전황은 이순신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이순신은 왜군이 노량해협을 건널 시간대를 예측했다. 왜군 연합군의 배 500척이 11월18일 아침 6시에 노량 일대에 집결한 것을 보고 새벽녘부터 군사를 준비시켰다. 이에 조선군은 밤 10시에 이동을 시작하여 자정쯤 노량해협의 우측인 관음포에 주둔했다. 명군은 노량해협의 좌측인 곤양 죽도에서 대기했다. 어둠을 틈타 은밀히 이동했기에 조명연합군의 위치를 오인했던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태세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순신은 왜군이 노량해협을 건널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조선 수군은 노량해협부터 아래 관음포까지 “횡렬로 포진”해 적들의 차후 이동 경로를 차단했고, “닻을 내리지 않고 응전 태세로 대기”(<난중잡록>)했다. 왜군이 해협을 건너 관음포 인근에서 대기할 때 조명연합군은 일제히 화공을 가하며 전투를 개시했다. 이순신의 의도대로 왜군은 노량해협의 물길을 타고 왔기에 다시 역류하여 도망칠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관음포로 전진하던 왜군은 날이 밝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라 관음포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자신들의 뒤엔 육지가 있고 꼼짝없이 갇혔단 사실을 그때 깨달은 것이다. 이순신이 의도한 전투 구도에서 조명연합군의 사진제공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화포 공격은 최대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투의 성과는?
윤휴의 <백호전서>는 노량해전에 왜군 연합군의 배가 500여척, 진린 휘하의 명나라 전선이 300여척 참여했다고 기술했다. 조명연합군은 “이순신의 분전으로 일본군의 머리를 900급 벴고, 일본의 배 200여척을 분멸”했다고 전해진다. 조명연합군은 1598년 7월경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격퇴하는 사로병진작전을 펼쳤다. 육지로 진격한 삼로의 전투가 모두 실패한 반면, 이순신의 해전만은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인색했던 선조마저 “해상 승리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위안이 되고 분도 풀린다”라고 말했다. 한편 한산도대첩의 이순신은 56척의 배로 일본 전선의 73척 중 59척을 쓰러뜨렸다. 명량해전에선 “12척의 배로 133척을 상대해 31척을 파괴”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노량: 죽음의 바다>의 클라이맥스, 백병전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백미 중 하나는 수백척의 배가 뒤엉키고 왜군과 조명연합군이 서로의 배에 올라타 싸우는 백병전 장면이다. 노량해전의 백병전에 대해선 여러 역사적 이견이 있지만, <충무공유사> 등에 따르면 “배 위의 군사가 칼과 창으로 마구 휘둘러 내려치니, 적진의 죽은 자는 부지기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나라에 뜻을 굽히지 않는 결단력
1598년 11월18일 이순신은 진린에게 노량 일대로 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진린은 반대했다. 결국 이순신은 진린의 뜻을 뒤로하고 독자적으로 배를 출동시켰다. 이후 진린은 어쩔 도리 없이 이경(밤 9시부터 자정.-편집자)에 그를 뒤따랐다. 결국 관음포의 좌우에 미리 자리 잡게 된 조명연합군은 변란에 대비할 수 있었다. 명나라 제독 유정과 진린은 이순신에게 일본의 퇴로를 열어주자고 이순신을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대장은 화친을 말해선 안되고 원수인 왜적을 놓아 보낼 수 없다”라며 강한 소탕 의지를 보였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이순신의 집념과 결기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관계도 전투력
이순신이 명나라에 적대적인 의견만을 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가 결국 이순신을 따른 일에도 이유는 있다. 평소 이순신은 명군과의 연회, 회식, 선물 교환 등을 꾸준히 이어가며 친밀감을 조성했다. 이를테면 1598년 7월19일 조명연합군은 절이도해전이란 본격적인 첫 연합 작전을 펼쳤다. 여기서 이순신은 적선 50여척을 불태우고 수급 70개를 베었다. 진린은 후방의 안전지대에 있던 터라 아무런 전과가 없었고 이에 격노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수급 40여개를 보내 진정시켰고 연합 작전의 초기부터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노량해전 시에도 이순신은 진린을 적극적으로 구해내며 존중을 나타냈고, 이에 명군의 신뢰감과 용기를 이끌었다.
애민정신의 발휘
많은 뇌물을 받은 진린이 “나는 고니시 유키나가 말고 남해의 적을 토벌”해야겠다고 말하자 이순신은 “남해인은 모두 포로이며 일본군이 아니오”라며 “명나라 황상께서 토벌을 명한 바는 조선의 백성을 구하고자 한 것이니 그들을 죽이는 일은 황상의 본의가 아니오”라고 일축했다. 답을 들은 진린이 격분하자 이순신은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대장이 되어 적을 버린 후 우리 백성을 죽일 순 없소”라고 응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진린의 논리를 격파한 지력,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살신성인의 정신이 이 짧은 대화에 모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