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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영화적 상상력은 역사를 어디까지 편집할 수 있는가, 패자의 관점에서 역사의 악센트 옮기기

1979년 12월12일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영화적으로 그리 매력적인 소재가 아니다. 승자와 패자가 명확할뿐더러 전두환 패거리가 승리하는 과정 역시 아주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어떻게 반란군이 승리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진압군은 패배했는가’라는 것으로 질문의 방향을 전환한다. 일반적인 역사 서술이라면 두 질문이 동일한 사실을 가리키겠지만, 영화에서는 이 질문의 차이가 전혀 다른 질감의 작품을 낳기도 한다. 선택된 질문에 따라 누구의 관점으로 그날의 사건을 바라볼 것인가, 달리 말해 관객은 누구의 시점으로 그 현장을 목격하는가, 라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질문의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역사의 악센트를 옮겨놓는다. 그렇다면 ‘패자의 관점’으로 역사의 악센트를 옮길 때, <서울의 봄>의 관객이 그 패배의 역사에서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사 물신((Narrative fetishism)으로서 이태신

1979년 12월12일, <서울의 봄>은 그날의 ‘역사적 표면’을 따라가는 영화다. <서울의 봄>은 그날 전두환이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이 (일시적으로) 승리했다는 불변의 역사적 결과와 그날의 타임라인에서 실제 발생했던 몇몇 사건들을 취사 선택한 뒤, 이를 두 남자(또는 두 진영)의 숨 막히는 대결로 각색한다. 전두광(황정민)이 실제 전두환을 뼈대로 하고 황정민의 신 들린 연기로 살을 붙여 완성되었다면, 이태신(정우성)은 장태완이라는 역사적 모델에서 이탈해 김성수의 ‘필요’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인물이다. 전두광이 전두환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반면, 이태신은 훨씬 더 자유로운 창작의 기회를 김성수에게 부여한다. 영화를 위해 새롭게 구축된 이태신에게서는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그에게서 김성수의 초기 인물들인 <비트>의 민이나 <무사>의 여솔 등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김성수의 초기 영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소중한 누군가(또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아웃사이더 청춘 남성으로 대변된다. 김성수가 이태신을 허구의 인물로 완성하면서도 장태완이 갑종 출신이었다는 사실만은 그대로 가져온 까닭은, 갑종이 군대 장교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의 위치를 갖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트>와 <무사>의 주인공 모두가 정우성이었다는 점인데, 이는 김성수가 이태신/정우성을 통해 비극적 페이소스를 끌어들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인물/배우를 선택했다는 증거다. 즉, 최소의 역사적 사실에 최대의 허구가 결합된 이태신은 영화가 전달하려는 역사적 메시지의 담지자일 뿐만 아니라, ‘패자의 페이소스’라는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인물이다.

초기 김성수 영화에 곧잘 제기된 비판 중 하나는 인물이 평면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봄>은 그 평면성을 더 노골화한다. <서울의 봄>의 경우, 그 평면성이 수없이 등장인물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해주고, 무엇보다 그렇게 구축된 캐릭터들이 거침없이 충돌하면서 서사의 속도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단순히 김성수의 한계라고 말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태신에게는 그 어떤 심리적 복잡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육군참모총장(이성민)이 이태신에게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에서, 이태신의 체구는 함께 벤치에 앉은 참모총장에 비해 태산처럼 크고 믿음직하게 묘사되는데, 그는 영화 내내 그 모습 그대로다. 이와 대조적인 장면이 하나회 입회식에서 후배에게 자신의 의자에 앉길 권하는 전두광의 모습이다. 이때 전두광 뒤로 비친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태산 같은 사람과 태산 같은 그림자에 지배당하는 사람. 이 두 이미지가 영화 내내 이태신과 전두광을 대변한다. <서울의 봄>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전두광의 모습이 더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느껴진 반면, 초지일관 하나의 이미지를 고집하는 이태신이 관객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우성 배우의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해도, 군인으로서의 가치와 윤리를 지독하게 고집하는 그의 캐릭터가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수는 이태신이 평면적이어야 한다는 점에 조금의 의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패자의 페이소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건이 평면적인 고집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이태신은 ‘패자일 때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가 동일한 캐릭터로서 승자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 과연 호소력이 있었을까? 관객은 그날의 결과, 그러니까 그날의 승자는 전두광이고 패자는 이태신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태신의 예정된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고, 그러한 신의 위치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패배의 길로 나아가는 이태신을 바라본다. 이태신은 표면적으로 전두광과 싸우지만 실제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불가역적인 역사, 또는 예정된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싸운다. 그래서 이태신의 패배는 비장함 그 이상이다. 심지어 숭고하게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패배는 페이소스로 넘쳐 흐른다. 그런 면에서 이태신은 그리스 비극의 영웅과 닮았다. 그가 평면적일 때, 그러니까 군인으로서의 윤리와 소명의식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고집스럽게 고집할 때, 그의 패배가 갖는 비극성이 더 커질 수 있다. 지금까지 몇몇 드라마에서 재연된 그날은 전두환이 승리했기 때문에 비극적이었다. <서울의 봄>은 이태신이 패배했기에 비극적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봄>은 그렇게 12·12 사태의 승자에서 패자로 역사의 악센트를 옮겨놓는다. 단순히 환원할 수는 없다 해도, <서울의 봄>의 관객들이 서로 배틀이라도 하듯 그날의 역사에 대한 답답함과 울분을 토로하는 것 역시 악센트를 이동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러한 반응이, 전두환(광)이 그날의 승자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두광이 역사의 승자가 되어서라기보다는 ‘지지 않을 수도 있는 싸움’을 끝내 졌다는 허구적 사실 때문에, 그러니까 역사의 악센트를 전두환(광)에서 이태신으로 옮겼을 때 가능한 반응이다.

영화 후반부, 이태신이 바리케이드를 넘어 전두광에게 다가가는 장면,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오로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그에게 저항한 군인 하나 정도는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철조망을 넘는 이 장면은 <서울의 봄>이 역사와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다. 이태신은 그날 밤 전두광에게 패했음에도 ‘정신적인 우월성’(또는 군인으로서의 우월성)을 확보한다. 그럼으로서 더이상 이태신은 패자가 아니고, 전두광 역시 온전한 승자가 아니다(이태신의 앞에서 보이는 전두광의 반응을 보라). 역사의 결과는 불변하지만, 군인이라는 직업윤리 속에서 전두광과 이태신은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이러한 면에서 이태신은 일종의 ‘서사 물신’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패배의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 해도, 그 위로 대체재로서의 역사를 덧쓰는 것, 그럼으로써 그 트라우마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 이러한 면에서 이태신은 이중적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그날의 패배를 대변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무력한 패배를 대체하는 물신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반란이 혁명으로 둔갑하는 그 패배의 순간을 무력하게 바라보면서도, 이태신을 통해 그 무력함에서 구원받는다.

이분법의 역사, 사라진 회색지대

<서울의 봄>은 그날의 사건을 철저하게 군대 내부의 문제로 한정하는 느낌을 준다. 불과 5개월 뒤에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자가 바로 전두환이지만, <서울의 봄>은 ‘직업 군인 전두환’으로 역사적 평가의 범위를 제한한다. 그래서 전두광은 인간 전두환에 비해 다소 협소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 엔딩에서 그날의 반란에 참여했던 자들의 기념사진 위로 군가 <전선을 간다>가 흐르며 이러한 인상이 배가된다. 어쩌면 <서울의 봄>에 재현된 군대 조직은 역사의 축약판으로 기능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의 봄>은 총과 탱크가 등장하는 영화 중 가장 ‘말이 많은 영화’다. 몇번의 총격전이 벌어지긴 하지만, 수없이 등장하는 군인과 총, 탱크에 비하면 두 세력간의 무력 충돌은 시늉만 내는 정도다. 전두광과 이태신은 치열한 총격전이 아닌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게이머처럼 대결한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하는 전두광에서부터, 동료 장교를 각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대는 반란군 장교들과 이태신의 모습까지, 영화는 반복적으로 설득의 과정을 새겨넣는다. 하지만 그 과정이 무색하게, <서울의 봄>은 너무나 쉽게 진압군과 반란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로 안착한다. 그로 인해 그 사이에 놓인 ‘역사의 회색지대’가 지워진다. <서울의 봄>은 두 세계의 갈림길(회색지대) 앞에서 망설이는 자들을 최소화한다. 물론 3군사령관(박원상)과 8공수 여단장(정현석) 정도가 그 갈림길에 아주 잠시 머물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살아 있는 대사가 있다. 이태신에게서 출격 요청을 받은 8공수 여단장은 “왜 저희 부대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 속에 회색지대에 놓인 자들의 세계, 그 딜레마가 묻어난다. <서울의 봄>은 이러한 회색지대를 최소화한 채 대립하는 두 진영의 충돌 속에 너무나 멋들어진 영화적 절정으로 치닫는 데 성공하지만, 그 대가로 역사는 반역자와 희생자로 단순하게 이분화되어야 한다. 역사에는 회색지대가 두텁게 존재할 수밖에 없고, 대다수 민중은 희생자와 가해자 중 어느 하나가 아닌 바로 이 회색지대에서 역사에 연루된다. 이분화된 세계는 이 대다수의 삶의 흔적을 지운다.

<서울의 봄>은 전두환의 승리를 치밀한 계략이나 하나회의 팀워크의 결과로 그리지 않는다. 실제로 전두광의 계획은 어긋나기 일쑤고, 그럴수록 전두광과 이태신의 대결은 더 팽팽해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서울의 봄>은 승리의 요인, 또는 패배의 원인을 ‘그들 바깥에’ 위치시킨다.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그러니까 전두환이 ‘똥별’이라 불렀던 그들의 결정적인 악수가 사태를 급변시키고, 그럼으로써 역사는 불가역적인 결과와 조우한다. 이때 이태신은 패자지만, 그 패배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완전무결한 군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가장 희극적인 인물들인 똥별들이 ‘지지 않을 싸움을 지게 한’ 역사적 비극의 원인으로 자리하면서 이태신을 패배의 원인에서 완전히 분리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태신은 ‘졌잘싸’로 남는다. 그리고 마음껏 미워할 만한 자들이 역사의 죄를 짊어질 때, 그날의 역사를 마주한 관객은 가해자와 희생자로 깔끔하게 나뉜 ‘표백된 역사’를 건네받는다. 역사와 연루된 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는 영화가 아닌, 일목요연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마치 엄청나게 팽팽한 경기였던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편집된 ‘스포츠 하이라이트’ 같은 영화, 그것이 <서울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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