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할아버지는 부동산에 나가고, 정신이 맑지 못한 할머니가 혼자 집을 지킨다. 학사모 쓴 아들의 사진을 꺼내 빼뚜룸히 걸어두고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머니는 운동화발로 마루에 들어와 장롱을 뒤지고 있던 도둑을 아들로 착각하고, 애지중지하던 자개보석함에서 손목시계를 꺼내준다. 점심을 먹으러 들른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당장 김장을 하자며 떼를 쓴다. 어느 날 소포로 배달되어온 보석함에는 진주목걸이며 노리개와 함께 부부의 젊은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들어 있다.
■ Review
<초겨울 점심>은 지글대는 조기구이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해서 빨갛게 잘 익은 김치를 비추며 상을 물린다. “이봐, 뭘 꾸물대?” 백발의 남편은 무뚝뚝하기 그지없지만,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해 날마다 식사를 준비하는 자상함이 있다. 매일 먹는 밥처럼 일상적이어서 ‘사랑’이나 ‘헌신’ 같은 이름을 붙이기조차 낯간지럽지만, 수천번의 끼니를 함께하며 같이 늙어온 이들의 정겨운 유대감과 안타까운 연민이 이 노인들에게는 어려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우걱우걱 김치를 씹는 할아버지의 밥상 맞은편에 그 김치를 담근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들여다본 빛바랜 사진들처럼, 세월의 비감이 따뜻하고도 서글픈 여운을 남기는 소품. 제55회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수상작이다. 황선우 jiv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