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수년에 걸쳐 거슬리는 인간들을 차례로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한다. 이런 사이코패스를 독자가 응원할 수 있을까. 그가 주인공이고 그의 내면의 지도를 상세히 제시하면서도, 독자가 사이코패스를 미워할 수만 없도록, 심지어 그의 범죄 행각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상황이 되자 그가 상황을 무사히 피해가도록 응원까지 하게 만드는 놀라운 전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사이코패스 톰의 어두운 영혼으로 향하는 계단 층의 높이를 서서히 높여가며 독자가 그에게 동화되도록 만든다. 살인 후 덤덤하게 시체를 처리하고 감흥조차 갖지 않는, 도덕심은 없지만 미식가이고 탐미적인 취향을 가진 복잡한 톰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없건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톰의 시선으로 그를 둘러싼 사회와 고급 취향의 집 안 정경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톰 리플리가 거짓말로 올라탄 계급 사다리를 투영하기도 하며,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이 노력 없이 타고난 부를 감사할 줄도 모르며 예술적 허영에 취해 상대를 무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리플리>는 자신이 살고 싶은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는 성격장애인 ‘리플리 증후군’의 어원이 된 고전소설이다.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의 원작 소설로 이 영화들은 5부작 <리플리> 중 리플리의 첫 살인이 펼쳐지는 <재능 있는 리플리>에서 비롯했다.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한번 시작된 살인을 수습하기 위해선 다음의 살인이 필요했다. 디키를 죽이고 디키를 모방하며 그의 재산을 멋대로 사용하는 리플리가 영원히 도망다닐 수 있을까?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을유문화사에서 새로운 번역과 디자인으로 펴낸 <리플리 5부작 세트>는 그 아름다운 면모가 마치 소설 속 리플리의 취향대로 꾸며진 정원과 같다. 각권의 표지는 이중적인 리플리의 인격과 이니셜을 담고 있어 한권씩 보면 미스터리한 암호와 같고 모아두면 기묘하게 어우러진다. 주요한 사건은 쾌속으로, 유럽의 풍광과 리플리의 심미안은 집요한 묘사로 그려진 이 소설은 안팎이 완벽한 소장 가치를 가진다.
<재능 있는 리플리>, 87쪽애증과 조바심과 절망이 뒤섞여 미칠 것 같은 감정이 가슴속에서 부글거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디키를 죽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