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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해피 엔드>
진영인 사진 오계옥 2023-11-21
이주란 지음 / 창비 펴냄

열한 가구가 사는 집에서 그나마 왕래가 있던 윗집 할아버지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났다. 집주인은 나중에 들어올 새 세입자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비어버린 집을 홀로 기웃거린다. 막걸리 한잔과 샤인머스캣을 윗집에 남겨두고, 그가 남긴 오래된 책 한권을 가지고 온다. 그렇게 일상에서 개인적인 장례식을 치르며, 마음에 일어난 파동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그 파동의 중심에는 한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와 어느 순간 관계가 끝나버린 사건이 있다. 솔직한 관계는 무엇인지, 다정하고 용감한 마음은 또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의문들이 일상에 내려앉아 있다.

<해피 엔드>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악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잔잔하고 차분하게 밀려드는 안개 낀 강물 같은 이야기다. 문득 생각나 사 먹은 구슬 아이스크림은 맛있고, 공장에서 키우는 개는 밥을 잘 먹고 똥도 잘 싼다. 유튜브를 열심히 하는 회사 동료가 더러워진 바지를 손빨래하는 동안, 그 모습을 영상에 담아주기도 한다. 뜨거운 여름의 새벽을 걸어보고, 비 내리는 거리도 돌아다닌다. 그렇게 큰일 없이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에는 과거의 외로움과 간절함이 새겨져 있다. 몸에 꼼꼼히 로션을 바르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폭력을 마구 휘두르면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울던 아버지 때문에 죄인처럼 굴며 자란 유년 시절도 떠올려본다. 결국 ‘나’는 용기를 내어, 나의 삶에 새겨진 외로움을 알아주었던 친구를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보기로 한다. 어쩌면 친구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그 간절함은 답 없는 메아리로 돌아올 수도 있다.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오래되고 깊은 마음들”을 왜 꼭 친구에게 이해받고 싶어 했는지, 답은 계속 찾지 못하리라. 그렇지만 친구에게 다가가는 그 긴 여정에 사소하고 반가운 사건들이 있다. 동료와 나눠 먹은 과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친절함. 결론은 나지 않고, 답 없이 빙빙 도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해피 엔드’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41쪽

“나는 고단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므로 되도록 무엇인가를 바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