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서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언어로서의 한국어를 기리는 날처럼 혼동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의 우수성을 따지는 건 괜찮다. 그걸 지나 한국어의 우월함을 이야기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물론 한국어로 표현된 고유의 정서와 사상이 아름다울 수는 있고, 그것은 오로지 한국어로서 접근될 때에만 그 온전한 맛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하는 건 옳다. 한국어에 잘 밀착된 한글은 그것의 문자적 표현과 접근을 더 용이하고 효과적이게 해줌을 환기시키는 일 역시 필요하다. 따라서 한글은 바로 우리말글 환경이 처한 현실의 제유(提喩)이며, 한글날을 계기로 그 현실에 대한 성찰을 북돋으려는 취지라 이해해줄 법도 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의식적으로 대유법적인 고찰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 어문의 현실은 나날이 비루해지고 있다. 구매자는 물론 판매자조차 잘 모르는 외국어 문자로 메뉴판이나 간판 등속을 쓰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됐다. 향찰과 이두 시대의 재림이라고까지 할 만하게, 계통 없이 뒤범벅된 표현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사실 이두나 향찰도 아니다. 한자를 빌려서라도 자신의 사상을 한국어에 부합하게 표기하려던 노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니 말이다.
지금의 문제는 한편으론 이중적 식민주의에 찌든 우쭐댐에 있다. 피눈물을 굳이 ‘혈(血)의 누(淚)’라고 적었던 이인직류의 전근대적 모화(慕華)와 근대적 숭일(崇日)이 탈근대에도 변함없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 대한 숭모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외국인이 드나들지도 않을 가게의 메뉴판을 굳이 그렇게 적는다는 것도 우습지만, 설령 그런다 해도 한국어-한글 아래에 외국어 문자를 적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 보면 기의의 전달과는 상관없이 기표의 그럴싸함을 목표하고 있었던 셈이니, 실로 탈근대적이기는 하다.다른 한편으론, 아마도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로서, 언어적·지적 게으름이 만연해 있다. 말과 글의 대상에게 되도록 순조롭게 다가가 정확한 의미로 꽂히게 하려는 노력은 찾아볼 길 없고, 그렇다고 약간의 난해함을 감수하더라도 진지한 사유를 촉진하려는 지적·언어적 분투를 하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저 대충 말하고 대충 쓴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쓰면, 그냥 적당히 알아듣는 척을 한다. 세칭 전문가들이 종종 그렇고, 전문가쯤은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기로 작심한 그 숱한 ‘나잘난’ 이들이 그렇다.
그리고 방송과 언론이 그렇다. 이미 그들 다수는 우리말글의 조성자이기는커녕 교란자의 단계에 들어섰다. 누군가 ‘언택트’라고 하면 그 말의 조리를 따지기보다 부리나케 퍼뜨리기 바쁘고, 어느 집단이 ‘갓생’이라고 하면 시류의 단면으로 여기기보다 당장이라도 모든 이들의 말과 생활이 된 양 열을 올린다. 유행어를 만들어 밀면 성공하던 개그맨들의 시대만도 못하다. 그래도 그땐 제법 신선했고, 그리 우쭐해하지도 않았다. 하긴, 기왕의 세태를 깔끔한 개념으로 정돈하기보다, 아직 싹도 트지 않은 현실을 어설픈 외국어 줄임말을 섞어 ‘트렌드’랍시고 팔아먹는, “TV에 나올 맛집” 부류의 장사치들이 자칭 전문가들이고 또 언론들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