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출가해 ‘도맹 스님’이 된 지나(이연), 유망한 조각가였으나 현재는 생업을 우선시하는 윤철(박종환), 그런 윤철의 연인 영지(강경헌). 세 인물의 행보를 좇는 영화 <절해고도>를 연출하기 전 김미영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이후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 소속으로 경험을 쌓은 뒤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각자가 편하게 느끼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며 김미영 감독은 인물들에 관해 애정하는 지인을 묘사하듯 이야기했다.

- 삶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 관계에 대한 인물들의 고민 등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연출자가 오랜 시간 같은 고민을 해왔기에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 원래 알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됐을 때 우리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족한 나일지라도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에 등장하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문장이 내게 오래,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이 문장과 더불어 다음 세대에 대한 생각이 많았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 즈음에는 다음 세대의 가능성을 더 확장해보게 됐다. 그들은 나와 내가 추측하는 범위를 넘어선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다음을 더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그런 마음이 지나를 비롯해 다른 인물들에게 반영된 것 같다.

- 부녀지간인 윤철과 지나의 관계가 인상적이었다. 둘 다 예술가를 꿈꿨고, 윤철이 차선책으로 원했던 출가의 길은 결국 지나가 택한다.

= 시나리오를 쓸 때 뛰어난 예술가를 부모로 둔 자식들에 관해 조사를 많이 했다. 특히 자식 역시 예술가가 됐을 경우 압박감을 느꼈다는 자료가 많더라. 세상과 부모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관계, 또 부모와 자식 사이를 떠나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를 설정하고 싶었다. 윤철과 지나를 설명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하곤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조금만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존재다. 지나도 그렇다.

- 윤철과 지나, 영지 모두 한곳에 정착하는 대신 새롭게 변화하고 나아가고자 한다.

= 윤철은 자기가 살아온 삶을 잘 인정하지 않고 의심하고,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영지는 두려움 없이 전진한다. 그것이 호스피스로 향하는 길일지라도 말이다. ‘길 도’에 ‘싹틀 맹’을 쓰는 ‘도맹’이라는 승려명처럼 지나는 맹아와 다름없는 존재다.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한다. 이처럼 각자의 태도는 다르지만 결국 끊임없이 움직이고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라 더 그런 것 같다.

- 그런 셋의 특성이 잘 살아난 데에는 배우의 지분이 크다. 배우 이연, 박종환, 강경헌과는 어떻게 함께하게 됐나.

= 이연 배우는 출연한 단편들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전주국제영화제 <담쟁이> GV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캐스팅을 결심했다. 배우의 가면을 쓰지 않고 본인으로서 앉아 있는 듯했고,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편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우리 영화에서 보여줬으면 했다. 배우 입장에서 삭발은 어려울 듯해 가발이나 CG까지 고려했는데 이연씨가 삭발하겠다고 해서 무리 없이 출연이 성사됐다. 박종환 배우는 개인적으로 <뎀프시롤: 참회록>이라는 작품에서의 연기를 정말 좋아한다. 배우가 지닌 특유의 페이소스가 윤철을 통해 잘 보여졌으면 싶었다. 강경헌 배우도 익히 잘 알고 있었는데 먼저 출연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줘서 무척 기뻤다. 그야말로 최상의 캐스팅이었다.

- 영화상에서 묘사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가령 윤철이 돌연 해외로 떠나 영지와 연락이 되지 않고, 객사할 뻔한 뒤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까지의 기간 등이 해당된다. 이 시기를 공백으로 처리한 이유가 있을까.

= 박종환 배우도 시나리오상에서 그 지점을 언급하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 사실 나는 특별히 시간을 건너뛰어 연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웃음) 내가 만든 인물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모든 시간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차피 타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추측이 가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너무 정확하게 모든 걸 그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특히 말했던 순간들이 윤철이 질풍노도를 겪을 시기라 그가 별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 임권택 감독의 <안개 마을>이 레퍼런스가 됐다고.

= <안개 마을>의 주요 컷들을 촬영감독, 그리고 스탭들과 같이 분석했다. 정석적인 팔로숏들이나 백팔로숏, 그리고 안개와 같은 풍광을 담아내는 방식이 좋아서 공부하면서 이미지적으로 눈이 뜨이는 계기가 됐다. 막상 임 감독님의 연출부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보니 당시에 정말 많이 배웠더라.

- 그런 공부를 바탕으로 촬영한 신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

=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절에서 윤철이 도맹 대신 빨래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윤철이 절을 떠나며 도맹에게 밤들을 건네는 장면이다. 후자의 신은 총 세번 찍었는데 앞선 두번의 촬영에선 박종환 배우가 그냥 도맹을 지나쳐갔다. 그런데 세 번째 촬영에선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도맹의 손에 밤을 쥐어주는 거다. 돌아선 도맹이 눈물을 터트리는 모습까지 전부 시나리오엔 없던 것들이다. 세속을 떠난 도맹이 절에서 혼자 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에 윤철이 따뜻한 마음을 건넨 때이고 그 장면을 기준으로 극의 분위기가 확실히 전환됨을 느꼈다.

- 감독에게도 일종의 수행처럼 여겨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절해고도>를 완성한 뒤 심적으로 변화한 부분이 있나.

= 영화를 찍고 나서 나로서도 예술, 종교와 같은 것들에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전에는 그것들이 훨씬 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에세이 <얼음 속을 걷다>에 쓰인 문구를 인용해도 될까. “동레미로 향하는 길은 더없이 음울하다.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지도 더이상 모르겠다. 그냥 되는대로 걸었다. 앞으로 쓰러지면 그것이 걸음이 된다.” 가깝게 지내던 PD가 죽음을 앞뒀다는 소식을 듣고 뮌헨에서 파리까지, 감독이 22일간 800km를 걸어가는 이야기다. 제대로 걷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PD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하나로 그저 걷고 또 걷는다. 앞으로 쓰러진다 해도 그것이 걸음이 된다는 말이 좋았다. 가끔 사람들은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믿곤 하지 않나. 그 믿음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두고,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결국 미래를 향한 한 걸음이 될 것이다. 실패해도 성공해도 괜찮다. 우린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고, 무엇이든 다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 걸어가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