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04년, 지중해 로도스섬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웠다. 태양의 신이자 섬의 수호신인 헬리오스 상이었다. 로도스섬은 원래도 동상으로 유명해서 이미 수천 개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동상은 그 어떤 것보다 컸다. 당시 아테네의 아테네 상이 12m였다. 로도스섬의 거상은 높이 32m로 완성되었다. 공사는 철근 뼈대에 작은 청동판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연히 발부터 시작해야 했다.
항구에 커다란 발이 나타난다. 엄지발가락이 사람 하나만 하다. 발등이 매끈하고 뒤꿈치가 단정한, 잘생긴 발이다. 구릿빛 피부는 태양 아래서 화려하게 빛난다. 이 발은 천천히 자란다. 정강이와 종아리, 무릎이 생겨나서 마침내 횃불을 치켜든 거대한 사람의 모습이 된다. 뼈가 강하고 근육이 아름다운 태양의 신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좋다. 거상이 완성되는 과정을 상상하는 게 좋다. 대단한 광경이었겠지. 바닥부터 서서히 자라는 신이라니. 헬리오스는 12년에 걸쳐 누구나 전율을 느낄 만한 크기로 자랐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그 동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로도스의 거상’은 불과 수십년 뒤에 무너져내렸다. 계산이 잘못된 것도, 공사가 부실한 것도 아니었다. 대지진 때문이었다. 부서진 조각들마저 수백년 뒤에 약탈당해 도로 용광로에서 녹아버렸다. 거의 1500년이 지났으니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거상도, 그걸 만든 사람들도 이제 없다는 게 마음에 든다.
생각해보면 공사장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동원된 것이 분한 사람도, 청동 만드는 법을 알아서 쏠쏠하게 재미를 본 사람도, 대작업에 참여하는 데서 자부심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태양신의 엉덩이 부분을 망치로 두드리며 자식 걱정을 하는 사람, 청동판을 제대로 들지 않는 동료 때문에 짜증난 사람, 아이가 태어나 기쁜 사람, 내일 도망칠 계획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 앞에 얼마나 많은 삶이 있었을까. 숭고한 삶을 산 사람도 있겠지. 모멸적인 인생을 견딘 사람도 있겠지. 충분히 사랑을 받은 삶도, 내내 울기만 한 삶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들 살았다가 죽고 또 살고 그랬다. 나도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 그러고 있다.
그러니까… 나 하나쯤 인생을 좀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 부분부분 망치는 건 정말 티도 안 날 것이다. 무력감이 거의 권태가 될 때, 변하지 않는 세상이 걱정스러울 때, 흔적 없이 사라진 거대한 동상과 사람들을 떠올린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되는대로 살아보자. 인생은 소중하지만,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없을지도 모르고. 내 삶에 의미라는 게 있다면, 수많은 사람의 하나로 살아가는 것 자체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존재하는 게 내 의무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