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제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낮은 해상도로부터>는 서이제의 소설집이다. 세상의 북적이는 구석구석의 장면들이 고해상도로 포착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에서 벽을 때리는 이웃의 소음에 시달리는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소음? 랩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랩은 소음이 된다. 옆집에 쪽지를 쓴다. 힙합으로 썼다. 매드클라운의 <Flowdown>(feat. 화나 & 탁 of 배치기)에서 인용했다. “그 잘난 이빨 갈아봤자 너는 겨우 다람쥐.” 써놓고 보니 다람쥐는 너무 귀엽고, 다람쥐 하니까 도토리가 생각났고, 도토리 하니까 미니홈피 생각이 나고. 쿵 쾅쾅. 그리고 깨닫는다. 지금 페이퍼를 써야 하는데 백지일 뿐인 페이퍼가 한숨과 두려움의 원천임을. 생각은 흘러흘러 한국문학이란 무엇일까에 닿는다. 쿵 쾅쾅. 생각은 흘러흘러, 쿵 쾅쾅! 한국 힙합의 랩 가사들이 곳곳에 각주 표시되어 등장하는 이 소설은 결국 힘 빠진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생각이 흘러흘러, 나의 잡생각과 당신의 심사숙고가 겹치는 지점을 짚어가며 소설들은 진행된다. <위시리스트♥>는 온라인서점 장바구니에 든 책의 종수와 가격을 논하며 시작한다. 언제나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출근이나 퇴근 혹은 그 사이의 사회생활은 역시 온갖 생각의 흐름과 그럴 때 기가 막히게 마주치는 광고들, 틈틈이 채워넣는 장바구니로 이루어져 있다. “물건들은 장바구니 안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정신을 차려보면 소진되어버린 삶의 폐허 같은 순간 속에서 피로는 수시로 우리를 엄습하고, 또 무언가가 계속 관심을 요구하며 우리 앞을 가득 채운다.”
이모티콘, 그림, 각주, SNS 화면들이 수시로 등장하는 <낮은 해상도로부터>의 소설들은 도둑맞은 집중력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를, 혹은 무엇을 읽고 있었는지를 기억해내기 위해 수시로 멈춰 서서 돌아보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그저 지금부터 다시, 또다시 시작할 뿐이다. 여기서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수많은 콘텐츠를 경유한다. 새로고침! 스크롤! 힙(hip)의 합(合). 정신 차리고 보면 남는 다소의 한숨과 피로. 이 시대의 핍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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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다가 모조리 지워버렸지만, 썼다가 지워버렸다는 사실은 모조리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모자이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