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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신비롭지 않은 바비들
임소연 2023-09-14

핑크를 기대했지만 온통 그레이다.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부터 핵폭탄이 만든 잿빛 하늘까지. 미국을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흥행 중인<바비>가 유독 한국에서는 상영관을 찾기 힘들 정도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천쪽이 넘는 과학자 평전을 사 읽고 과학 공부까지 하며 보러 가는 <오펜하이머>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냥 켄, 아니 백인 남성 과학자의 이야기에 한국인들은 왜 이토록 진심인 것일까? 아, 물론 나도 과학에 진심이다.

<바비>의 많은 것들이 좋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바비는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 중 후자를 택한다. 바비가 청바지와 면티에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현실 세계에 발을 내딛으며 처음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산부인과 의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왔어요”라는 대사를 듣기 전까지 나는 바비가 직장 면접을 보거나 출근하러 가는 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바비가 인간 여성이 되면서 가장 처음 한 일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것이라니!

아, 바비는 인간 여성이 아니었지! 현실 세계에서 산부인과를 방문한 바비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바비랜드의 ‘그녀’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인간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생물학적 몸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을 닮고 인간의 이름으로 불리며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인형이라니…. 우리는 이런 인형을 ‘로봇’이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던가? 최근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전 사회적 관심 속에서도 창의성이나 의식 여부 등에 비하면 몸은 그렇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인간성의 정수가 정신에 있다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로봇 바비와 인간 바비의 차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몸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찾아보니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한 그레타 거윅 감독의 설명은 이렇다. 자신이 10대 소녀였을 때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몸을 숨기려고 했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의 소녀들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고. 그러고 보니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하며 밝고 환하게 웃던 바비의 얼굴이 기억난다.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가는 인간 바비라니. 거대한 바비가 나타나자 엄마 놀이를 하던 어린 여자아이들이 아기 인형을 집어던지던 영화의 첫 장면과 묘하게 연결된다.

여성형 로봇 바비에게는 없지만 여자 인간 바비에게 있는 몸, 특히 산부인과의 대상이 되는 몸은 여성의 생식기능과 관련이 있다. 바비랜드가 여자들의 유토피아일 수 있었던 것은 바비들이 아이를 낳는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 세계 여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거윅의 바람처럼 희망은 당당하게 산부인과에 가는 바비에게 있다. 희망은 자신의 몸과 삶을 신비롭게 두지 않는 여자들 그리고 여성의 몸과 삶을 신비롭게 두지 않는 과학에 있다. 과학과 여자에 진심인 내가 <바비>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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