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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한 남자’,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소설 <한 남자>를 읽고 남긴 독서 메모를 보니, “다소 설명적이고 논평적”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 때문이었을까?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한 남자>는 소설과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작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사변적 설명을 이토록 매력적인 ‘영화적 행간’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비 오는 오후 문구점의 리에(안도 사쿠라)의 눈물, 낯선 손님의 등장과 멈추는 눈물, 그리고 정전으로 리에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워진 문구점을 환히 밝혀주던 불빛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실질적인) 첫 장면을 떠올려보라. 이 장면만으로도 이시카와 게이가 소설의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압축하고, 형태 변환하는지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낙인 찍힌 자들의 뒷모습

‘타니구치 다이스케’라는 이름이 죽은 남편(구보타 마사타카)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부인과 시아주버님(인 줄 알았건만 생판 남남)인 타니구치 쿄이치(마시마 히데카즈)는 이렇게 묻는다. “그럼 이 사람은, 대체 누구죠?”라고. 그것이 영화의 첫 질문이다. 부인의 의뢰로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 키도(쓰마부키 사토시)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X’라 칭하면서 누구와 누구가 이름을 바꿨는지 알아내려 한다. 그런 그를 두고 호적 교환 브로커 오미우라 노미오(에모토 아키라)는 바보라며 비아냥거린다. 그는 호적 교환이라는 용어를 ‘호적 세탁’으로 정정한다. 호적 교환은 과거라는 얼룩을 세탁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때문에 키도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왜 그들은 정체불명의 X가 되기를 각오하면서까지 과거를 지우려 한 것일까? 왜 그들은 새로운 과거 위에서 자신을 새롭게 써내려가려 한 것일까, 라는 것이어야 한다.

이름을 교환한다는 것은 과거를 세탁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이름을 부르는 호명의 행위가 누군가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일이고, 그래서 이름(명칭)이 그 사람(특정 부류나 집단)의 정체성과 동일시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그리고 그 이름에 부여된 정체성은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우리에게 부여되곤 한다. 그것이 이름에 대한 영화인 <한 남자>에 다양한 상속이 등장하는 이유다. 자식에게 주어지는 이름의 상속뿐만 아니라, 료칸의 상속, 일본이라는 국가의 상속자로서의 일본인과 그 자격을 의심받는 재일 한국인(자이니치)의 구별 짓기, 그리고 무엇보다 ‘죄의 상속’. 이를 통해 <한 남자>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즉 타인에 의해 주어진 이름이 과연 우리의 삶 전부를 규정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일본 사회에 만연한 차별주의로까지 확장한다. 살인자의 아들, 재일 한국인, 북한 등의 호명은 그 자체로 누군가(또는 집단)를 특정한 성격의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낙인 찍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낙인 찍기가 악마 같은 인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키도가 경험했듯)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의 ‘평범’한 대화에 스며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족쇄로서의 이름(이는 이름을 계승하는 것, 예를 들면 가업을 잇는 것이 미덕인 일본 사회의 어두운 그늘 아닐까?). 이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오미우라가 키도를 두고 ‘자이니치답지 않은 자이니치’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 아주 ‘자이니치스럽다’는 얘기라고 말할 때다. 키도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떻게 생겼든, 그 성품이 어떠하든 간에 오미우라에게 키도는 그저 자이니치일 뿐이다.

프레임, 프레임, 그리고 또 프레임

주어진 ‘이름’으로 규정되고 낙인 찍힌 삶,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얼굴. 그렇기에 누군가는 얼굴을 돌린 채 뒷모습으로만 존재하려 한다. <한 남자>는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에게 그의 얼굴을 되돌려주기 위한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작은 프레임 안의 남자)을 뒤쫓다, 그에게 동화되는 키도(큰 프레임 안의 남자)가 등장하고, 그리고 그러한 키도를 바라보는 관객을 프레임 바깥의 또 다른 존재로 위치시키는 프레임 놀이가 펼쳐진다.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은 영화의 메타포이자 서사적 형식이다. 물론 이는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영화와 소설 사이에는 사소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소설이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작가가 사건과 그에 얽힌 인물들을 설명하고 논평하는 형식인데, 이시카와 게이는 의도적으로 이 작가의 존재를 삭제한다. 영화에서 이 화자의 역할은 키도의 몫인데, 그는 사건의 외부가 아닌 사건의 일부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소설 속 작가와 질적으로 구별된다. (작은 프레임 속) X를 조사하며 재일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하는 이는 바로 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키도는 보고 들으면서도, 보여진다. 결국 키도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쫓으면서도 또 다른 뒷모습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키도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탐정을 닮았다.

이처럼 이시카와 게이는 소설에서 사건 외부에 있던 화자를 사건 내부로 이동시키면서, 작가가 위치했던 사건 외부(큰 프레임 바깥)의 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그것이 소설이 완결적인 반면에 영화는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이자, 엔딩의 키도가 “저는…”이라며 이름을 말하기 전에 영화를 끝맺는 이유다. 스스로를 X의 자리로 내던진 그를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그에 대한 답은 관객의 몫이고, 이는 관객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그의 삶에 얼마나 공감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해 영화의 엔딩에 생략된 이름은,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라는 질문이다.

‘본다는 것’에 대한 믿음

영화 <한 남자>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소설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또 다른 미학의 형태로 전환시키는 이시카와 게이의 연출 방향이다. ‘본다는 것’에 대한 이시카와 게이의 믿음. 그는 ‘보는 행위’의 힘을 믿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키도가 X로 지칭했던 하라 마코토의 과거가 키도(와 관객)에게 전달되는 일련의 시퀀스를 떠올려보라. 두 번째 만남에서 오미우라가 묻는다. 남의 몸에 문신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몸에 문신하는 문신사를 거론하며 자신이 오미우라 노미오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 대화 위로 마술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접견을 마치고 비 오는 거리를 걷는 키도의 뒷모습이 이어진다. 이때 키도는 어린 시절의 하라 마코토와 마주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불가능한 시선의 교환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두 사람의 시선 교환 직후, “하라 마코토는 아주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고, “살인자의 자식 따위는 다 그런 법”이라고 외치는 오미우라의 얼굴이 인서트로 삽입된다. 영화에서 이 순간만큼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재현된 얼굴은 없다. 그렇다면 이 얼굴이 왜 그토록 강렬하게 키도(그리고 관객)에게 각인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오미우라의 얼굴이, 그리고 하라 마코토의 환영이 키도의 기억과 상상이 불러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낙인 찍고 멸시하는 그 얼굴에서 키도는 제3자의 자리에 머물수 없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하라 마코토를 환영으로 소환하는 이유다. 그는 소년에게서 자신을 본다. 이시카와 게이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 전제된 반응이다. 그 믿음이 소설과 다른 질감의 영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시카와 게이는 이 장면에 멈추지 않는다. 소설과 달리 소년 하라 마코토는 살인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이시카와 게이는 이 장면을 소년의 눈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관객은 그 각인된 눈을 본다. 그것도 두번이나(두 번째는 아버지가 체포될 때다). 소설에는 없던 장면이다. 굳이 소년에게 이 상황을 직접 보게 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도, 소년에게 그 상황을 각인시키지 않고서,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눈에 펼쳐내지 않고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미칠 듯 괴로워하는, 그렇기에 자신의 과거를 모두 지우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하라 마코토의 심리적 고통에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키도는 하라 마코토, 다이스케, X라 불렸던 한 남자의 과거를 기록한 조사보고서를 리에에게 전달하고 되돌아가는 거리에서 뒷모습으로만 존재했던 한 남자와 마주한다. 소설에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문득 멈춰 선 그가 이쪽을 향해 미소 짓는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올랐다. 오로지 그 뒷모습만을 쫓았고, 겨우 옆얼굴만 얼핏얼핏 봤던 그와 처음 정면으로 마주했다는 마음이 들었다”라고 말이다.

과거를 지우고 뒷모습으로만 남고자 했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얼굴을 찾았다. 얼굴을 잃었던 소년은 이제야 얼굴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있는 힘껏 살았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리에와 함께한 3년9개월의 힘 덕분이다. 키도는 조사보고서를 리에에게 전달하며, 하라 마코토에게 리에와 함께한 3년9개월은 인생의 전부였을 거라고, 그는 정말 행복했을 거라고 덧붙인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키도의 이 말을 의심할 수 없다. 소설에서도 키도는 리에에게 동일한 말을 건네지만, 그들의 행복은 구체적 묘사 없이 행복이라는 단어로 익히 알려진 그 의미를 ‘지시’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키도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할 때 즉각적으로 ‘한 장면’을 떠올린다. 리에 가족의 아침 식사 장면. 3년9개월의 가족생활에 대해 우리가 본 것은 이 장면이 전부다. 단 한 장면이지만, 마치 스케치처럼 묘사된 이 장면은 두 사람이 느꼈을 행복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시카와 게이는 영화 시작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핸드헬드 카메라와 빠른 템포의 편집, 그리고 가장 밝은 톤의 조명으로 이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짧은 장면이지만, 과장되지 않은, 생기 넘치는 행복. 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하라 마코토가 있는 힘껏,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살았을 두 번째 삶, 그리고 인생의 전부였을 3년9개월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 장면이 이토록 행복하게 느껴진 까닭은 서로를 위로하던 두 사람을 이미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 안에서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괴로워하는 하라 마코토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등을 쓰다듬어주던 리에의 눈물. 한 식당에서 료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리에의 눈물, 그리고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에 빈손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던 리에의 그 손을, 슬며시 덮어주던 하라 마코토의 손길은 너무나 아름답다. 소설적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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