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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시대가 배신한 영웅의 삶에 대하여, ‘오펜하이머’
이종필(물리학자) 2023-08-16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이번엔 실존 인물의 전기를 택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의 바탕이 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제목처럼 오펜하이머는 인류에 원자에너지의 축복과 저주를 함께 선사한 역사적 인물이다. <씨네21>에서는 영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에 앞서 크리스토퍼 놀런마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 매력적인 인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가 인류 역사의 분기점을 만든 위대한 과학자이자 한명의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오펜하이머의 삶을 요약해주었다. 여기 역사의 일부가 된 한 인간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기록을 전한다.

20세기를 특징짓는 단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말할 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 세상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거기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원자핵 속에 감춰졌던 그 에너지는 이전에 인류가 사용하던 에너지보다 최소 수백만배나 더 큰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다. 그렇게 큰 에너지를 일시에 분출하도록 만든 핵무기는 도시 하나를 완전히 절멸시킬 위력을 가졌으며 그 때문에 오랜 세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던 전쟁의 개념조차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핵무기의 등장과 일본의 패망으로 형성된 전후질서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물리학자들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역사상 가장 극명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바로 오펜하이머다.

알려지지 않은 미지까지 잡아낼 줄 아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67)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분야 책임자로서 당시 미 버클리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다. 오펜하이머는 21살이던 1925년 하버드대학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천재였다. 언어능력도 출중해서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으며 그중에는 산스크리트어도 있었다. 하버드에서 그의 전공은 화학이었으나 자신의 관심이 물리학에 있음을 깨닫고 퍼시 윌리엄스 브리지먼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하버드를 졸업한 뒤에는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그의 지도교수는 1897년 전자를 발견한 J. J. 톰슨이었다. 톰슨은 노벨상도 수상한 저명한 과학자였지만 당시는 은퇴한 명예교수였다. 그러나 실험물리학은 오펜하이머와 잘 맞지도 않았고 재능도 없었다. 케임브리지에서 1년을 보낸 오펜하이머는 독일의 괴팅겐으로 옮겼다. 실험물리학 중심의 영국보다 이론물리학 중심의 독일이 오펜하이머와 훨씬 더 잘 맞았다.

오펜하이머가 케임브리지를 떠났던 1926년의 괴팅겐은 말하자면 양자역학의 혁명을 주도했던 본산이었다. 오펜하이머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그 혁명의 핵심에 있었던 막스 보른이었다. 보른은 오펜하이머가 괴팅겐에 도착하기 직전에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을 제시했다. 이는 고전역학과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이듬해 박사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등에서 유학한 뒤 1929년 버클리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학문의 혁명기에 그 중심지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후 10여년간 오펜하이머의 연구는 이론물리학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다. 1930년 발표한 ‘전자와 양성자 이론에 대해’라는 논문은 1928년 폴 디랙이 발표한 디랙방정식의 풀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디랙은 자신의 방정식에서 도출되는 음의 에너지 풀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양성자로 인식하기도 했었다. 오펜하이머는 만약 그 풀이가 양성자라면 원자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했다. 이후 이 입자는 전자와 질량이 같아야 하며 결국 양전자(positron)라는 새로운 입자임이 밝혀졌다.

1935년에는 자신의 박사후연구원 멜바 필립스와 함께 ‘중양성자 변환기능의 특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핵물리학과 관련된 연구였다. 오펜하이머는 여기서 맨해튼 프로젝트까지 계속 핵물리학을 연구한 게 아니고 30년대 후반에는 천체물리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1938년과 39년에 걸쳐 중성자별 및 중력수축에 관해 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중성자별이 존재할 수 있는 질량의 상한선인 톨먼-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도 이때 제시됐다. 또한 충분히 무거운 별의 연료가 고갈돼 끝없이 중력수축을 겪을 때, 어떤 경계면 바깥의 관측자에게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것은 중력붕괴로 블랙홀이 형성되는 과정을 제시한 것이다. 바로 그 무렵 유럽에서는 독일의 오토 한이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우라늄에 중성자를 때리는 실험 결과를 분석하고 있었다. 한의 동료였던 리제 마이트너는 나치를 피해 덴마크를 거쳐 스웨덴에 있으면서 조카인 오토 프리슈와 함께 한의 실험 결과가 핵분열이라는 새로운 현상임을 올바르게 해석했다. 1939년 핵분열 소식은 미국에도 퍼졌고 그때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한 폭탄의 가능성도 실질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해 10월 레오 실라드와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미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전해졌고 루스벨트는 임시로 우라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미국을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게 한 것은 영국이었다. 프리슈는 루돌프 파이얼스와 함께 1940년 우라늄의 연쇄핵반응, 거기 필요한 최소질량, 폭탄제조법, 파괴력 등을 담은 ‘슈퍼폭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프리슈-파이얼스 보고서는 영국에서 모드위원회라는 새로운 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모드위원회의 결론은 2년 안에 비행기에 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드위원회의 최종보고서를 접한 미국은 발빠르게 움직여 대통령 직속으로 새로이 S-1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무렵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에서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입자가속기를 처음 제작한 어니스트 로런스와 함께 핵무기를 연구하며 과학자들의 비밀회합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1942년 5월 S-1위원회의 고속중성자 연구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해 중반부터는 핵무기 개발의 중심이 육군으로 옮겨지면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대령이었던 레슬리 그로브스가 장군으로 진급하며 프로젝트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그로브스는 10월 과학 분야 연구책임자로 오펜하이머를 임명했다.

오펜하이머의 임명은 많은 이들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오펜하이머는 실험물리학자도 아니었고 대규모 연구진을 운영한 경험도 없었고 노벨상 수상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면 때문에 그로브스는 자신의 파트너로 오펜하이머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을 알아봤다. 그로브스의 평가에 따르면 사이클로트론 개발로 노벨상까지 받은 로런스는 똑똑한 사람이긴 하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그로브스의 눈에 진정한 천재는 오펜하이머였다. 굳이 구분해서 말하자면 똑똑한 사람은 알려진 지식(known knowns)을 많이 또 잘 아는 사람이다. 그로브스가 원했던 천재는 알려진 미지(known unknowns)와 함께 알려지지 않은 미지(unkown unknowns)까지도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천재는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지식이 많은 똑똑한 사람을 천재와 동일시해왔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핵무기라는 전례 없는 물건을 처음으로 만들어야 하는 그로브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전자보다 후자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이런 천재성은 다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사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본다. 오펜하이머는 스포츠를 빼고는 모든 걸 다 안다는 농담이 절반 이상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앞서 그의 연구 내용을 소개했지만 오펜하이머는 한 가지 주제에 완전히 빠져들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한 주제에서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내고는 이내 다른 주제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오펜하이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도 그의 이런 성향 때문이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확실히 핵무기를 처음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라면 한두 분야에서의 스페셜리스트보다 다방면에 걸친 제너럴리스트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대단한 이유는 그가 정말로 제너럴리스트였으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여러 분야뿐만 아니라 화학이나 공학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우월한 지적 능력으로 다른 연구자들을 압도했다. 그 결과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모든 문제들을 다 알고 있었으며 거기에 대한 모든 해결책도 제시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펜하이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물리학자들은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고 로스앨러모스에 모인 이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던 터라 이들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무엇보다 이들 각각이 자신들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능력과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펜하이머는 그런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모두가 자신들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며, 로스앨러모스에서는 오펜하이머를 실망시키면 뭔가 잘못된 일이라는 느낌이 드는 분위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펜하이머의 이런 리더십은 다른 분야의 지도자들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내 손에 아직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

또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체 책임자였던 그로브스와 맞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공병이었던 그로브스는 뼛속까지 군인이라 철저한 보안과 위계질서 속의 조직운영을 선호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을 파트별로 나눠 칸막이화(compartmentalization)해서 통제하려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런 방식이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소통을 방해하고 결국 창의적인 발상에 치명적일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사실 어느 과학자라도 그런 식으로 통제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 개방성과 수평적 소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오펜하이머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연구책임자의 역할을 했을 것이고 언젠가는 핵무기도 결국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성공적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을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시작한 지 만 3년이 되기 전인 1945년 7월16일 최초의 핵무기 실험(‘트리니티’)에 성공했고 그로부터 불과 3주 뒤에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을 사흘 간격으로 실전에 투하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것은 전후 그가 스파이로 몰려 청문회에 불려나가 비밀취급인가를 만료 하루 전에 박탈당한 사건이었다. 오펜하이머의 동생 내외가 공산당원이었고 주변에 좌익 인사들이 많았으며 그들과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오펜하이머가 연구책임자로 임명될 때에도 제기되었고 육군에서 비밀취급인가를 선뜻 허락하지 않기도 했었다. 아예 처음부터 오펜하이머를 연구책임자로 임명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전쟁이 다 끝난 뒤에 그를 간첩으로 몰아 모욕을 준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하다. 전쟁 전후 달라진 게 있다면 핵무기를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태도였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에게 “내 손에 아직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으며 국제적인 핵무기 통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정치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후 세계질서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위력의 핵무기가 더 많이, 그것도 미국에 독점적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핵무기 개발의 주역이 이런 입장에 반대하고 나섰으니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소신을 숨기고 조용히 살았다면, 또는 권력의 요구에 따라 소신을 바꾸었더라면 말년까지 국가적인 영웅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자기 손에 묻은 피를 잊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소신과 양심을 지키는 것이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시대가 프로메테우스적인 한 영웅을 배신한 것으로 유죄 선고를 받아 마땅하다.

2022년 미 에너지부 장관은 1954년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 대한 비밀취급인가를 취소한 결정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참고도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저자 카이 버드),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저자 제레미 번스타인), <원자폭탄 만들기>(저자 리처드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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