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이번에는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국내 최초 로봇 지휘자를 소개하는 TV 뉴스를 봤다. 지휘봉을 휘두르는 로봇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수십명의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며칠 후 국립극장에서 연주할 곡을 연습 중이었다. 요즘 각광받는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도 탑재한 로봇인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실제 지휘자의 동작을 따라 움직이도록 사전에 입력된 로봇이었다. 뻣뻣하게 고정되어 있는 하체와 대조적으로 로봇 상체의 팔은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얼굴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박자에 따라 살짝 까딱거리는 고개 덕분인지 전체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로봇의 이름은 에버6(EveR-6). 에버(Ever)는 태초의 여성을 뜻하는 이브(Eve)에 로봇(Robot)의 R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2006년에 탄생한 에버1은 한국 연구진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든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인간 여성과 비슷한 외모와 행동은 물론 감정 표현까지 할 수 있게 얼굴에만 15개의 모터가 들어가 있으며 400개의 단어로 대화도 가능했다. 2006년 어린이날 첫선을 보인 에버1이 당시 산업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며 건넨 첫마디는 “안녕하세요. 홍차와 커피가 있는데 뭘 드시겠습니까?”였다. 당시 에버1에 주어진 임무는 박물관을 안내하거나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에버가 본격적으로 예술·공연계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같은 해에 나온 에버2부터였다. 로봇박람회 개막식 가수 경력을 가진 에버2와는 달리 에버3는 처음부터 배우용으로 제작돼 여러 차례 국악 공연 무대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에버3는 2009년 한 국제산업박람회에서 재난 구조용으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로봇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에버4는 에버3에 비해 알려진 바가 많진 않으나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 로봇관을 빛냈고 에버5는 2018년 대구에서 세계 최초 융복합 로봇 오페라 무대에도 도전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지금까지 다섯 에버들의 화려한 활약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지켜보며 나는 단 한번도 에버가 멋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2009년 독일 하노버산업박람회 한국관 앞에 전시되었던 에버3는 잘 매만져진 검은 머리에 짙은 자주색의 여성용 한복을 입고 있었다. 바로 옆에 선 휴보가 에버보다 훨씬 작은 키에 금속 재질의 전신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애초에 에버1부터 키 160cm, 몸무게 50kg인 20대 초반의 한국 여성을 닮도록 만들어졌고 그때부터 모든 에버들은 공연장이든 과학관이든 박람회든 진한 화장과 긴 머리에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그런데 에버6는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의 회색 머리에는 털 한올 붙어 있지 않고 흰색 금속 몸체는 연결 부품과 전선까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휴보처럼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쯤 되면 헷갈린다. 내 눈에 에버6가 멋있어 보인 이유는 지휘를 잘해서일까, 이런 외모 덕분일까.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분홍 입술에 발그레한 볼을 한 에버가 지휘봉을 잡았다면 혹시 지휘를 잘 못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더 즐겁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니까 에버6는 왜 갑자기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