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는 <피아니스트>로 오랜 숙원을 풀었다. 지난 1986년 경쟁부문에 올린 작품 <해적>이 ‘재난’으로 판명된 뒤, 그는 배우 아니면 심사위원 자격으로나 칸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반전을 준비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고행과 치유의 지난한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폴란스키는 필생의 작업 <피아니스트>를 위해 40년 만에 모국 폴란드로 돌아갔고, 16년 만에 레드카펫을 밟았고, 그리고 생애 처음 황금종려상까지 안았다.
유대계 폴란드인인 로만 폴란스키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들고 칸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화제의 초점은 폴란스키가 자신의 경험을 어떤 모양새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영화화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폴란드 크라코우의 유대인 거류지에서 성장한 로만 폴란스키는 나치 캠프의 가스실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 제의를 고사했을 때 그는 조국 폴란드를 떠나면서 봉인해놓은 고통스런 유년의 기억을 들춰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살아남은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야, 폴란스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폴란드의 비극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렇게 만든 영화가 <피아니스트>다.
나치의 세력하에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 피아니스트 스필만이 피아노 연주곡을 녹음하고 있던 라디오방송국도 폭격을 당한다.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고 홀로 남은 스필만은 유대인 거류지를 떠돌며 생존을 위한 고투를 벌인다. 나치의 눈을 피해 폐허 속을 떠돌던 스필만은 독일 장교와 마주치는데, 그는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에 깊이 감명받아 수용소행을 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시간이 흘러 스필만은 못다한 피아노 연주를 녹음하던 날, 자신을 도와준 독일 장교가 포로 수용소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피아니스트>는 매끈하게 잘 만든 휴먼드라마로, 칸보다는 오스카에 어울릴 법한 영화다. <쉰들러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감상주의에 빠지거나 멜로드라마의 곁길로 새지 않고, 냉정하고 담담하게 ‘역사’와 ‘예술’과 ‘인간애’를 이야기한다. 폴란스키의 원점 회귀와 거리두기 시도는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사전정보 없이 본다면, <악마의 씨> <차이나타운> <비터문> 등을 통해 성과 폭력과 공포에 대한 남다른 비전을 보였던, 그 감독의 작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다. <피아니스트>는 <테스>와 더불어 폴란스키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온건한 작품이 됐다. <버라이어티>가 “견고하고 우아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진부한 영화”라고 평하는 등 언론과 평단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지만, 일반 시사에서 많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결국 심사위원단의 마음까지 훔쳤다.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사적인 영화로 느껴진다.__나 자신의 기억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크라코바의 게토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영화의 배경을 바르샤바로 잡았고, 당시의 자료를 수집했다. 원작은 스필만의 실제 경험담으로, 내 얘기는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묘사가 가능했다. 원작 자체가 절제의 힘을 갖고 있는데, 영화에서 그 힘을 간직하려고 했다.
영화 후반부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주인공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입장, 즉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이야기인가.
__내가 답할 질문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자에게 물어보라.
당신 자신이 크라코바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는가.
__촬영보다는 영화를 위한 자료수집, 시나리오 구성 등의 준비과정이 더 힘들었다. 준비과정에서 때때로 오래 전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요소들을 마주하는 바람에 더 괴로웠다.
이전의 몽환적인 판타지류의 영화와 이번처럼 실제 역사와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간에 차이가 있는가. 이를 계기로 차후 연출방향에 변화가 있을 것인가.
__당연히 당신이 말한 두 종류의 영화간에는 차이가 있다. 진실된 주제가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흥미롭다. 피상적인 즐거움만 주는 영화는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과거에 경박한 영화만 만들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이번 촬영중에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엑스트라들도 많이 지지해주었다. 약 1200명이 아침 일찍부터 해질 무렵까지 함께 일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환상적이었다. 영화를 마친 뒤에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감독의 진을 빼는 것은 촬영이 아니라, 현대사회에 만연하는 소비풍조, 스튜디오와의 문제,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각종 메모 및 분장이다. 이번에는 감독의 힘의 80%를 앗아가버리는 이런 부차적인 문제들에 전혀 시달리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1%의 힘도 뺏기지 않았다.
영화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는 신은 원작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추가된 것인가.
__주인공 아버지의 대사 중 미국을 비난하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 미국에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어야 했다는 내용인데, 원작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영미권 주재 폴란드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통해 나치의 만행을 폭로한 예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제를 자세히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영화의 방향을 흔들어놓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서 유보했다. ▶ 칸영화제 5월26일 폐막, 황금종려상에 <피아니스트>
▶ 칸 이모저모 & 칸에서 온 기억할만한 말들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1)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2) - 로만 폴란스키(황금종려상)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3) - 아키 카우리스마키(심사위원 대상)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4) - 폴 토머스 앤더슨(감독상)
▶ 사진으로 보는 칸의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