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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그 여름’, 여름이었다 사랑이었다
이우빈 2023-06-08

“여름이었다.” 여름날의 청춘이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 으레 유행처럼 수식되는 말이다. 여기엔 강렬한 낮의 폭염과 매미 소리, 잔잔한 밤의 정경과 풀벌레 소리가 공존하는 여름 감성의 낙폭이 담겨 있다. 애니메이션 <그 여름> 속 이경과 수이의 사랑도 그렇다. 열여덟살의 여름, 활기찬 교정, 두 여자 고등학생의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보증하듯 둘의 만남은 치사량의 설렘을 만끽한다. 그러나 연애의 온도는 차차 낮아진다. 현실적 조건, 제3의 인물, 갈등의 누적은 여느 연애의 과정처럼 둘의 사랑을 방해한다.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전환된 <그 여름>은 이러한 사랑의 온도 차이를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이미지의 힘, 그리고 각색을 통한 서술 시점의 변화로 색다르게 강조한다.

증폭된 ‘그 여름’의 감각

한낮의 고등학교 운동장, 수이가 찬 축구공에 이경이 맞는다. 코피가 나고 땅에 떨어진 안경이 부러질 만큼 머리를 세게 맞았다. 이경과 수이의 첫 만남은 이렇게나 급작스럽고 강렬한 사고다. 이들을 매개한 물리적 고통은 서로를 향한 심적 충격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열여덟의 여름을 나던 둘에게 심적 충격이란 당연하게도 사랑이다. 원작 소설에선 이러한 둘의 시작을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던 이경이 수이가 찬 공에 얼굴을 맞았다.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가 날 정도의 충격이었다”란 두 문장으로 담담하게 읊어낸다. <쇼코의 미소>부터 이어진 최은영 작가 특유의 문체다. 때마다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사건과 인물의 속내를 건조하게 읊는다. <헤어질 결심> 속 비유를 빌려오면, 차근차근 쌓인 문장들이 서서히 마음에 스며들어오는, 독자는 그 끝에 이르러 자신이 소설에 흠뻑 물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방식이다.

애니메이션 <그 여름>은 조금 다르다. 이야기의 시작은 원작과 같지만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수이의 축구공이 날아오는 시간은 이경의 주관적 시점에서 슬로모션으로 재생된다. 이어서 아파하는 이경, 그런 이경에게 달려오는 수이, 머리 위로 흔들리는 나뭇잎이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교차한다. 수이가 느낀 당시의 시간성과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경과 수이가 서로를 보고 만지는 순간들도 마찬가지다. 가령 이경과 수이가 길을 거닌다는 한줄의 문장이 애니메이션으로 바뀔 땐 이경이 훔쳐보는 수이의 눈망울, 입술, 햇볕에 탄 살갗이 가시화된다. “창고 구석에서 수이를 처음 안았을 때 내가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다”라는 수이의 내레이션과 함께 오고 가는 둘의 숨결과 살결은 이들의 물리적 사랑을 화면에 분명하게 새긴다. 이렇게 한지원 감독의 <그 여름>은 두 사람이 느낀 사랑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증폭한다. 다시 <헤어질 결심>의 비유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그 여름>의 감정은 매 순간 격랑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힘이 강하여 단기간의 감정적 몰입도를 높인다.

물론 감정의 지연된 간접 전이, 즉각적 직접 전이 중 어느 쪽이 우월한지는 쉬이 판단할 수 없다. 후자의 방법론을 따른 애니메이션 <그 여름>이 원작 소설의 정제되고 통일된 형식미를 다소 상쇄하며 감정선의 비균질함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다만 한지원 감독이 그간 고수해온 애니메이터의 자의식을 놓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애니메이션으로서 본작의 중핵은 이경과 수이가 느꼈을 ‘그 여름’이란 시공간의 시각적 재현이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란 그때의 시공간을 지배했던 주변의 분위기와 배경으로부터 강하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한지원 감독이 집중한 것이 화면 속 인물의 후경에 그려냈거나 독자적 숏으로 추가한 풍광, 빛, 공기, 건물, 교각, 가구, 방 안 물건의 상세다. 가령 이경과 수이가 다니던 분식집의 창밖, 그들이 마주한 댐 물의 난반사가 적절히 구체화될수록 그 여름의 향취는 강해진다. 이 상세들의 연속이 서사의 틈 곳곳에서 삐져나와 과거의 감각을 되살린다. 원작 소설의 강점을 대담히 변주하며 애니메이션만의 효과를 얻어내는 데 집중한 것이다.

서술 시점의 변화를 통한 감정적 동일시

원작 소설 <그 여름>은 3인칭 시점으로 기술된다. 앞서 말했듯 사건이나 상황의 설명을 최소화하고 인물의 심상은 소설 바깥의 시점에서 감정의 동일시를 배제한 채 서술된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대개 이경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작품의 서사가 이경 중심이란 뼈대는 같으나 여기서도 표현 방식의 차이점을 둔 것이다. 예컨대 소설의 첫 문장은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이다. 이것이 애니메이션에선 “수이와 나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란 수이의 내레이션으로 변한다. 서술의 주요 시점을 옮김으로써 이경의 상황과 감정을 보다 더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로써 관객은 이경과 수이의 감정에 더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동일시된다.

감정의 동일시는 그들이 사랑에 흠뻑 취했을 때만 찾아오지 않는다. 성인이 된 이경과 수이가 사랑의 이해타산을 마주하며 침체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스무살이 된 둘의 상황은 현격히 다르다. 이경은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입학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수이는 서울 근교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직업 훈련에 매진한다. 잠시 소원하던 둘의 관계는 수이가 이경의 근처로 이사 오면서 다시금 회복된다. 물리적 충격으로 시작했던 사랑이니만큼 그들의 마음은 물리적 거리, 물리적 환경에 따라 가깝고 멀어진다. 이즈음에서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보증금 오백만원은 이경과 수이의 관계를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즉 객관적으로 기술된 사랑의 현실적 조건이 독자의 폐부를 뾰족하게 찌른다. 애니메이션은 이 문장을 “수이가 마련한 보증금 오백만원은 우리의 사랑을 윤택하게 만들었다”로 변주한다. 원작의 담백함이 묻어 있되 돈을 마련한 것이 ‘너’이고 윤택해진 것은 ‘우리’의 사랑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것이 수이의 목소리로 재생된다. 두 사람이 스산한 사랑의 이해를 마주하며 겪은 아픔이 관객의 마음을 은근히 뭉개는 방식이다.

한편 원작에 명시되지 않았던 수이 시점의 몇몇 장면이 애니메이션에서 추가되기도 했다. 가령 이경과 수이가 다툰 후의 상황에서 애니메이션은 이경이 떠난 길가를 수이가 되돌아보는 모습을 추가한다. 그 겨울 새벽의 한복판에서 이경을 기다렸던 수이의 행동과 표정이 드러나자 그들이 마주한 처연함의 낙차는 한층 더 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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