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많은 분량의 1년 전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물론 지겹지만,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뭘 그리 허겁지겁 살아왔는지 출판한 책을 ‘교정본’ 용도로나마 들여다본 게 아주 최근 일이니 미출간 원고를 ‘개작’하는 일은 20년 만에 최초라 할 만하겠다. 나 같은 사람을 문인이라고 해도 되나…. 나는 뒤늦게, 아니 세월을 뒤집으며 ‘절차탁마’의 재미를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싫어진다. 삶이 ‘복합적으로 복잡’해져, 아니면 숱한 동전 양면에 사고 자체를 포기해서, 아니면 ‘그러나’의 ‘단절-단호’보다는 총체를 느끼고 싶어서? 하긴 옛날에, 아메리카인디언 소설을 번역하면서 ‘그러므로’와 ‘그러나’를 바꿔쓰는 방식으로 미국 내 인디언의 처지를 형상화하는 것에 경악-감동한 적이 있기는 했다. <새벽으로 만든 집>….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좀더 온기가 느껴지지만 너무 길고 부대낀다.
어쨌거나, 그렇게 문장(혹은 문체)에 ‘예민’을 떨다보니 좋은 문학작품들이 더 좋게 읽힌다. 최근, 세 사람의 소설작품집과 한 사람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월드컵 16강을 ‘넘어선’ 행복을 맛보았다.
이혜경 소설집 <꽃그늘 아래>는 일상의 시난고난을 지문처럼 정교하게 직조해오던 작가가 마침내 도달한, 현대물리학 표현을 빌리자면 ‘극미세계의 불가사의’로서 ‘꽃그늘 아래’다. 조경란 소설집 <코끼리를 찾아서>는 곱디고운 ‘정신분열’ 문체가 삶-경험의 폭압을 감당하면서 스스로 이룬 비몽사몽의 ‘코끼리’가 정말 감동적이다. 이승우 소설집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는 ‘문학의 절망’을 ‘글의 몸, 즉 문체’의 희망으로 역전시킬 듯, 문장이, 문장 반복으로 문장 반복이 문장 질문으로 문장 질문이 마침내 문장‘력’으로, 되는 과정이 끊임없이 가속화한다.
<나는 아주 오래…>를 먼저 읽었는데, 그 추동력이 계속 나머지 두 작품집도 추동한다. 그렇게 세 소설집은 한몸으로 뒤엉킨다. 축구보다 강렬하고 시보다 섬세한 소설‘문학’이 그렇게 태어난다, 났다.
그리고 소설보다 그물망이 푸짐한 한편의 시가 또 그것을 감싼다, 감쌌다. 아주 조금만 읽자. 한 공기의 밥도 반쯤 덜어내시는/…. (중략) 것도 다 못드시면 어떡해요?/ 짐짓 언성도 좀 드높혔지만 (중략)/ 나는 그 절반이 이미 하늘 밥으로/ 덜어놓은 것임을 알고 있다. (김명인 시집 <바다의 아코디언> 수록 ‘하늘 밥’ 중)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