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레인보우>는 뇌라는 하드 디스크에서 연애에 관련된 데이터들이 저장된 폴더를 일부러 손상시킨 뒤, 다시 그것을 복구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잊어버리는 행위 자체는 보통 삶의 현재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잊어버린 기억’은 물건이 아니라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기억상실’을 다룬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는 기억을, 혹은 망각을 물건 다루듯 한다. 주인공 스스로가 바로 그런 방식의 내러티브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남들에 의해 기억이 되찾아지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생생하게 느끼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논지의 말을 하지만, 그것은 작은 몸짓에 불과하다. 지하철 유실물센터에 모인 가방들과 기억의 하드에 모인 추억의 데이터들의 상동성. 영화는 그렇게 ‘대상화’시켜놓고 조작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말이다.
음악은 박호준, 음악감독은 이영호·이소윤이 맡았다. 영화를 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음악은 제목에서도, 기억 속의 여자를 가리키는 상징적 이름에서도 등장하는 ‘무지개’, 그래서 <Over the Rainbow>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디 갤런드가 부르는 스탠더드 넘버 <Over the Rainbow>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왜 주디 갤런드일까? 이 1930년대의 스탠더드 넘버와 영화 <Over the Rainbow>는 무슨 상관일까? 영화 중간에는 마치 (약간 어설픈) 진 켈리처럼 분한 이정재가 우산을 들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Singing in the Rain>이 흐른다. 사랑은 비를 타고라…. 이정재가 기상통보관이니까 뭐 쓸데없는 비약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와 그런 할리우드 고전의 냄새가 나는 세팅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달콤하고 흥미로운 노래들이라 가져다 썼을까? 이정재와 진 켈리의 단순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이정재의 어떤 멋진 모습?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만일 패러디하려 했거나 차용하려 했다면 좀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해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할리우드의 코드를 우리도 이용할 수 있다. 충분히, 아주 충분히. <오즈의 마법사>라면 더 동화적으로, <Singing in the Rain>이라면 더 뮤지컬적으로 흥미있게, 아예 내러티브를 담갔다가 빼는 과감함이 조금 아쉬웠다. 나중에 힙합풍으로 다시 편곡된 <Over the Rainbow>를 이은정이 부르고 있다. 스탠더드로 갔으면 확실히 가주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골라진 음악들의 불충분함에 비하면 영화에 쓰인 음악 자체는 좋다. 음악이 그리 잘 들리지 않는 대목이 많지만 그게 좋았다. 들릴 듯 말 듯 밑에서 기능하는 음악들을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음악을 쓴 사람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다. 언뜻 평범하고 별것 아닌 멜로디지만, 상당히 충실한 편곡들을 바탕으로 세련되게 연주된 음악들이 많았다. 프로페셔널한 작곡법을 연마한 사람들의 곡들이라는 느낌. 때로 리듬감을 필요로 하는 대목에서 쓰인 음악들도 좋은 드라이브감을 지닌 음악들이 많았다.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 지난해 다르고 올해 다르다. 부쩍부쩍 전문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눈으로 귀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 어느 나라의 영화가 그렇겠는가. 중흥기라는 수식어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영화마다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도 그렇다. 매끄러운 영화이긴 하지만, 하드가 그렇게 쉽게 복구되고 그 배경으로 할리우드가 그렇게 쉽게 인용되나? 잘 생각해야 한다. 가져다 쓸 때는, 명확한 이유와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한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